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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lecture
특강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1-05 (일)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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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상함을 고치시고 인생의 수고를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
삶의 상함을 고치시고 인생의 수고를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
                          (전도서 고찰)
                                                       이종덕목사(화원언약교회)



 전도서는 히브리 성경의 분류로는 케투빔에 속합니다. 케투빔은 ‘글들’이라는 뜻으로서 토라(율법서)와 느비임(선지서)을 제외한 글들 모음입니다. 룻기,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전도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코헬렛인데, 이를 70인역경이 Ecclesiastes(불러 모으는)라고 번역했습니다. 그것을 우리 한글 성경은 중국성경을 따라 전도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코헬렛은 한 단어로 그 의미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원 의미를 살려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지혜(섭리)를 아는 자가 회중을 소집하기 위해 모으는 책이라 할 것입니다.  

 전도서에 접근할 때에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히브리인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불신자를 향한 교훈 모음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도서가 기독교 허무주의, 즉 삶의 허무를 가르치는 글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억할 것은 전도서는 설교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삶의 지혜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어서 삶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지혜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유명한 화두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12장 8절에서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됩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이 주장은 전도자가 전도서를 시작하는 방식이고 또 전도서를 끝맺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여기 ‘하벨 하바림’이라는 표현은 정말로, 최고로 헛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헛됨’이란 단어는 ‘숨’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다 ‘숨’이고, 단지 ‘숨’에 지나지 않으며, 오직 ‘숨’일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도서의 이 구절은 허무에 대한 선언처럼 보여집니다. 여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표현만을 놓고 보면 마치 전도자가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합니다. 1장 3절에서 그 헛됨의 내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모든 것은 그 의미와 목적에 있어서 확실히 헛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죄 아래의 사이클을 깨뜨리시지 않으신다면, 또 우리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우리 구속을 향해 일하지 않으신다면 이 선언은 확실합니다.

 대관절 인생의 수고와 그 결과에 대하여 이렇게 참혹하고 혹독하게 공격하는 비관주의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무슨 권리로 사람의 수고를 이렇게 매도합니까? 전도서는 1장 1절에서 자신을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으로 밝히고 12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전도자는 솔로몬 왕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4장 31절 이하에서 우리는 솔로몬에 대하여 말하는 증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 와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모든 민족 중에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또 그는 번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치리하던 때의 이스라엘이 번영의 시대였고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어 “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라고 하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은금이 돌같이 흔하고 백성들은 안녕을 누렸습니다. 게다가 이에 더해 솔로몬왕 개인적으로도 무수한 재물을 얻었고 수 많은 여인들을 취하고 가고자 하는 모든 곳으로 여행하며 음악을 들여와 곡조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솔로몬이 지금 삶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수고요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주장에 동의가 됩니까? 무엇 때문에, 무엇에 근거해서 솔로몬은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이는 솔로몬이 성경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낙원을 상실한 세상이 죽음으로, 또 가시와 엉겅퀴와 땀과 눈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교제로부터 추방됨으로 특징됨을 알았습니다. 아담은 일평생 땅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일 것입니다. 삶의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는 생애 이후에 아담은 자신이 취함을 입은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유익합니까? 유익하지 않습니다. 왜 유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으로 땅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 수고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합니다. 이 진리는 전도자가 성경에서 배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전도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 전도자는 ‘해 아래서’ 사는 삶이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오직 전도서에서만 나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창6;17, 출17:14, 신7:24, 9;14 등). ‘천하’(天下) 혹은 ‘해 아래서(땅)’는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심판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맛보는 곳은 ‘해 아래서’, 즉 ‘땅에서’입니다. 이 진리는 전도자가 성경에서 배운 실재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경험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과 상관없이 이 진리가 진실임을 알았습니다.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복음의 약속을 붙들고 ‘여자의 씨’로 오실 구원자를 얼마나 갈망했겠습니까? 이 부부는 아들 ‘가인’을 얻고는 천하를 얻을 것처럼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부부에게 엄청난 좌절과 실망만을 안겨주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을 얻었을 때, 이들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아벨’이라 했습니다. 이 이름이 전도서의 주제인 ‘헛됨’(헤벨)이란 단어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담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흘러왔고 각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수고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발전, 진보로 설명될 수 있는 무수한 일들이 일어나고 쇠퇴해 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끝은 죽음이었고,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누구도 낙원을 잃어버린 상실과 비참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모든 일이 수고로 가득차 있고,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1:9)는 비통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타락 그 자체를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없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습니다.”(1:15) 솔로몬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이 진리를 보았습니다. 이런 번영이 만족으로 이끌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가 회복된 낙원으로 이끌었습니까? 아닙니다. 죄에 빠짐은 땅에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왔고 사람의 수고는 그 저주를 무효화할 수 없었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초기 통치에 위로(상승) 후에 불가피하게 아래로(쇠퇴)가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낙담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4)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때와 그 때에 따른 특정한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전도자는 3:2-8절에서 긍정과 부정의 서로 상반되는 열네 쌍의 긴 목록을 제시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그 시종을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와 질서가 오히려 인생과 역사를 의미 있고 아름답게 하심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뜻을 따라 자기 힘으로 자기를 위해서 행하는 것들에 의미와 가치가 있으면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실은 정반대입니다. 해 아래의 땅에 거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무지합니다.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죄의 탐욕에 지배당하며 족함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인간의 죄된 성향은 하나님의 길을 거스르고 저항하며 훼방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에서 모든 것은 죄에 빠짐에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비판하거나 불순종할 합당한 이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길 위에 두신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비록 죄의 비참으로 인한 파산된 삶으로 인해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대면하게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혜로 길 위에 두신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하기에 즐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힘든 문제들이 섭리 속에 주어진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상의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전도자는 삶은 수고와 눈물로 특징지어질 것을 알았습니다(창3:19). 하나님의 저주는 항상 삶을 특징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할지라도 이 저주를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진리는 ‘해 아래’에 살고 있는 각 사람의 마음에 반드시 새겨야 할 첫 번째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열정적입니까? 여러분은 모든 것을 바꾸고, 모든 것을 치료하고, 모든 것을 개선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은 굽은 것을 곧게 하기를 원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 사람아,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만약 전도서의 내용이, 결론이 이렇게만 끝난다면 이 결론은 우리를 얼마나 비통하게 합니까? 그러나 이어 ‘해 아래서’ 일어난 일과 함께 ‘해 위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수고에 대하여 덧붙여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유심히 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사람은 인생의 문제들을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고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은 고통과 거부당함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여러분, 여기에 하늘에서 구속자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실 것이고, 땅에서 그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지나가는 숨이 아닐 것이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시편 기자들과 선지자들의 입에서도 동일하게 증거되었습니다. “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야웨로부터 옵니다”(시124:8). 하나님께서 친히 자비 가운데서 당신의 복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지 않는다면 땅에서는 저주뿐이므로 헛되고 우리 손의 수고는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땀과 눈물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운명(삶의 상함)을 개선시킬 수 없습니다.

삶의 상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세상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해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늘로부터 땅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의 눈물 골짜기로 들어오셔서 인생의 비참을 맛보고 삶의 상함을 겪으셨으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구속주께서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서 갈보리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세 시간 동안 높이 떠 있던 해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났습니다”(롬1: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주어진 저주, 즉 전 세대에 걸쳐서 모든 사람의 수고를 헛되고 무의미하게 만든 하나님의 저주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권위의 음성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외치셨습니다. 곧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수고와 땀의 사역은 완성되었고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초상집’은 이제 우리의 ‘잔치집’이 되었고, 우리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유익된, 하나님의 기억안에서 영원히 남게될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제 더 이상 이 땅의 수고가 무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었던, 죄의 비참과 저주가 제거되고 낙원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수고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신음함은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시는 저주아래서의 신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제거되어 이 상한 삶을 특징짓는 헛됨도 또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이 순간들을 결정하시는 분은 야웨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앞에 초상집과 잔치집을 두신 분은 야웨 하나님이십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두신 분이 야웨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0주일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이 모든 것들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부터 우리에게 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기한과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경영과 일하심에 더하거나 덜 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치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하심이라”(전3:14). 믿음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여전히 파산된 삶의 상함을 대면할지라도, 세상이 의와 공평이 아니라, 수 많은 부조리와 불의로 만연한 폐단을 볼지라도 우리가 대면하는 현실이 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만이 참이요 실재임을 인정하고 신뢰합시다.

 이 진리를 은혜로 알게 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고 말합니다. 분명히 인생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제하시기에 주의 자녀들은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초조해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완벽하게 통치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부침들을 마주할 수 있으나 이 모든 부침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광의 길은 고난을 통해서 이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방법(섭리)이 우리를 영광으로 이끈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확신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부분의 기회들에 안심합시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음식을 즐기며, 음료를 즐기며,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일상을 즐거워합시다. 이것이 솔로몬이 5장 18절에서 주는 교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손의 수고는 이제 더 이상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도 우리의 웃음과 눈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한 ‘위치’를 차지하며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는데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질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해 위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수고가 ‘해 아래서’의 우리의 수고를 붙들고 계시기에 하나님 나라의 진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잊지 맙시다. ‘저주가 제거되었고, 복이 승인되었습니다!’

시편 128편에서 “야웨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야웨의 약속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야웨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발전을 하는 방법입니다. 야웨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땅에서 삶을 개선하는 방법입니다. 야웨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타락으로 상실했던 낙원의 어떤 것을 다시 맛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무엇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은 우리의 주림과 비참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날마다의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영원한 주림과 비참의 원인을 없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자는 사람이 삶의 상함을 고칠 수 없고, 모든 수고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절대적인 헛됨은 저주 아래서의 수고요, 그리스도의 구속 밖에서의 행함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없는 수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이 세상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땀은 헛되고 무익하며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고, 주님께 순종함으로 행해진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이런 수고는 성공이며, 이런 수고는 값집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행하는 언약의 자녀들의 수고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부요함을 현시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이 여러분에게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줍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이 그저 수고롭게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언약의 성취와 약속들을 붙드십시오! 저주가 제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는 지 모를지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 위에 두사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 수고가 어떤 수고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걸어갑시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자기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확인은 몸을 위하는 방식입니다. 번영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현재를 즐기는 것이 각 사람에게 최고의 목적이 되어 버린 이 탐욕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의 시선을 ‘해 아래’가 아니라, ‘해 위의’ 하나님께 견고히 두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가야 할 길!,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는 확고한 사실 앞에 애써 눈을 돌리지 않도록 합시다. 부와 만족과 번영으로 이끌리는 부패한 본성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깨어 경성하며 우리의 마음에 ‘영원’을 심으신 주의 경영이 이루어지게 합시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전7:8)

 이제 전도자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삶의 의미, 즉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 것이 더 귀함을 교훈합니다. 죽는 것은 해 아래 인생의 끝이요 출생은 그 시작이나, 인생의 시작보다 이제는 그 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시작하였는가 하는 것보다 그 인생을 어떻게 마감하며 끝내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이것이 인생 전체의 질과 의미를 결정한다고 전도자는 제시합니다. 이것이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솔로몬이 말하는 바의 요점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어야”합니다.

 누구보다도 부귀를 누렸고 자기 백성들에게 번영의 시대를 가져온 솔로몬왕이지만 그는 그것이 ‘해 아래’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짐을 깨닫게 되자 포도열매를 들고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안연히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잊지 말 것과 그들의 번영이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게 하는지를 알고 잊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각 사람은 시일을 달리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날을 정하셨고, 그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하여 깨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즐기고 있는 번영의 삶이 우리의 인생의 더 큰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멀어지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을 전부로 알거나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장차 올 나라를 소망하면서 세상을 침노한 천국이 우리의 일상의 공간에 구현되도록 ‘대조성’을 가지고 산 위의 동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주신 ‘선물’(지혜, 건강, 부, 은사 등)을 그 왕국과 왕국에서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처럼 여겨 마음이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상함을 고치시고 우리의 수고를 더 이상 헛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수고가 계속 우리를 주장하며 이끌어가게 합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다.” 문제의 결론을 들어보자. 그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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