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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lecture
특강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19-02-10 (일) 16:46
홈페이지 http://www.hwc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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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있는 그리스도인의 소명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있는 그리스도인의 소명
                                                    이종덕목사(화원언약교회)

성경읽기 : 창8:20-9:7, 12:1-3절
설교본문 : 창12:1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은 홍수 후의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적 왕인 아담과 언약을 맺은 것처럼 본문 또한 노아와 언약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이 일반 은총입니까? 자연과 맺은 언약입니까?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입니다. 언약은 사람과 맺었고, 특히 신자와 그의 자녀가 대상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녀를 언약의 자녀라, 약속의 자녀라 말합니다. 홍수 심판 후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하신 것은 일반 은혜가 아니라, 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번제물의 희생제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의도가 어려서부터 악할 지라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왜 지금은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홍수 후의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제사’에 근거해서 사람의 죄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바꾸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경륜에는 문화와 통치 권세에 대한 것까지 다 포함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있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성령께서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 듣는 마음을 주셔서 믿음의 순종을 일으켜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노아와 맺은 언약을 통해 홍수 후의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보존하실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알 것은 노아의 위치입니다. 노아는 믿음을 가진 한 개인이 아니고,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적 교회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제 노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창9:5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노아(교회)가 악인들을 다스리고 필요시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재판, 통치권은 교회에게 맡겨진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후 인류는 국가가 형성된 후, 일반은총의 영역으로 세속정부에게 이 모든 권리를 다 양도해 버렸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문명이 계속해서 번성하지 못하도록 악인들의 번성과 문명을 멈추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번성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약속된 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흔히들 창8:22절의 “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언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자연 법칙’에 대한 것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자연의 세상’은 오직 신자들과 함께 함으로만 보호를 받습니다.

 만일 불신자들이 소위 ‘일반 은총’의 은덕(해와 비, 공기의 혜택, 노동의 결과인 결실 맺음 등)을 누리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신자들의 땅(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불법 거주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은혜’는 주의 상(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일뿐입니다. 땅위에 신자(교회)가 없다면 그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언약의 복’으로 다스리겠습니까? 심판하셔서 멸절시키시겠습니까? 교회 없는 어떤 은혜도, 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하나님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와 둥지를 치며 거주하고 있는 불법거주자들인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문명과 부를 마치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즐기면서 전혀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때문에 세상을 보존하며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이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여 그 부스러기 은총을 간접적으로 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복도 번영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누리든, 어떤 형편에 있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 사는 복을 받은 성도들조차도 자신들이 경험하고 받은 복이 얼마나 복되고 풍성한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신자들의 번영과 물질과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모습은 얼마나 비통한 모습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언약의 약속은 항구적인 복음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시는 세상 질서를 파괴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옛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새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교회가 드린 번제물은 우리의 영원한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존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서 노아의 번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노아의 번제물은 노아의 교회와 세상을 보존하게 했습니다. 이와 동일한 이유로 교회 때문에 교회와 함께 둘러 서 있는 물리적인 세상을 보존해 주십니다.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 자체로 세상에 ‘복’이 됩니다. 성도는 복된 회중입니다.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로서도 ‘산 위의 동네’로 세상에게 증거하는 빛과 소금입니다. 흩어져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에도 그리스도의 복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언약의 자녀들에게 잘 상속되어 계속해서 경건한 후손들이 끊어지지 않고 교회가 세대를 이어가며 보존되는 일은 어떤 것보다 위대하고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일에 더욱 기쁨으로 헌신합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는 명령을 받은 것은 전체 세상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번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홍수 전에 악인들을 잘라내지 않으시고 땅에 번성하는 것을 허용하시기도 하셨지만 이제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잘라내는 일을 행하십니다. 번성하는 복은 오직 의인들에게만 약속되었습니다.(출1:7)
 통치의 주체는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은 하나님의 참된 형상인 교회에게 주어졌습니다. 함의 후손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는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9:25). 그들은 통치의 자리에서 제거되었고 통치를 받아야만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교도 정부, 이교도 행정관이 칼을 가지고 시민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교회라는 줄의 끝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 인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악인들에게 다스리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권세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세상을 보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창조의 원 목적대로 오직 하나님의 참 형상을 반영하는 교회에 의해 전체 세상이 다스려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구속받은 언약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방인들을 ‘짐승들’과 ‘종들’로 묘사하는 것을 봅니다. 왕국의 통치는 아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속의 세상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을 옳게 비출 때, 짐승들인 악인들이 회개하여 주께 나아올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 전도를 통해 종들과 짐승들을 자유자(갈5:1)가 되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업(교회)에 함께 참예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문화의 시작과 끝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통치의 칼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날 세속 정부에게 모든 통치의 칼을 다 맡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차선으로 그저 좋은 정부가 들어설 것만 기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일입니다. 정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부이든, 이교도 정부이든, 정부의 칼은 교회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주이시며 왕이십니다. 그 분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평입니다. 이 정부가, 온 열방이 능하신 주님의 손이 되도록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지지하며 견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타락으로 왜곡되어진 파산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참된 현실을 억누르고 신화를 받아들입니다.(롬1:18) 우리는 외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은 롬13:1-7에서 로마의 가이사의 권세를 설명하길, 교회가 만약 옳게 행동한다면 통치자는 교회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악하게 행동한다면, 통치자는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종들인 세상 관원들이 교회로부터 명받은 대로 행동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신실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통치자들의 마음을 회심하게 하고 통치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르게 통치할 것입니다. 반대로, 통치자들이 악하고 파괴적이라면, 이는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봅시다. 요셉이 신실 할 때에 바로는 회심했습니다. 다니엘이 신실했을 때에, 느브갓네살은 회심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점령한 것은 유다가 배교하고 악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전체에 걸쳐서 세상의 모습은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의 신실함 혹은 불신실함이 전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약 또한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의 운명이 교회의 손에 맡겨져 있음을. 교회는 온 세상을 판단합니다. 매고 푸는 권세가 교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온 세상의 통치자와 직분자로서 우리가 어떤 문화를 건설하며 세울 것인지를 도전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번영과 어떤 복이 여러분의 시야를 채울 때에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받은 복의 부스러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깨달은 바울은 찰나적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조금도 쓸모없는 헛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진동치 않을 영원한 나라의 성격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서 있는 곳, 교회가 상속받은 기업은 썩지 않는 나라요, 진동치 않을 영생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았던, 성인 세례를 받았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세례의 표’는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이 표는 예수께서 육체의 영역에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신령의 영역에서는 부활하심처럼, 우리 또한 신령의 영역에서 이미 부활한 자임을 증거해 줍니다. 세례의 표는 우리를 육체의 욕망이 아닌 그리스도의 나라와 영생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살게 합니다. 오직 신앙의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늘 그물에 스스로를 가두어 살게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의 부와 번성을 쫓아가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문화에 취하지 마십시오. 이세대의 정신, 가치에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입니다. 교회는 항상 문화를 담당하고 홍수 이래로 책임져왔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문화를 불신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문화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언약공동체인 교회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소명을 책임감 있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세상은 수많은 부조리와 한계와 저주의 결과로 뒤엉켜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세상의 회복과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천상의 영역에서나, 아니면 마지막 날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한 공간과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말씀에 준비된 세상이요, 그 통치가 실재하는 공간입니다. 결코 이 세상과 주님을 분리시키지 맙시다.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에 앉으셔서 만유를 다스리는 주님의 통치가 실재가 되게 합시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음으로,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자리에 주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의 세례의 표가 증거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는 도리’에 굳게 섬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셈의 후예 아브라함에게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이렇게 현시하셨습니다. “너는 가라!” 다시 말해 야웨는 아브람을 그 고향, 친척, 아버지 집에서 불러내셔서 야웨께서 알려주실(지시하실) 땅으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람의 일가가 살고 있던 곳은 고대 도시 ‘우르’입니다. 이 도시는 달의 신 ‘난나’를 섬기는 강력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가나안’(야웨께서 지시한 땅)을 향해 가는 길에 하란이 있었습니다. 반달형태의 비옥한 토지를 경유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려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사이에 위치한 땅이 ‘하란’입니다.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대략 2600km정도의 대장정이 요구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950km이고, 일본 동경까지의 거리가 대략 1160km입니다. 그러니 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죠? 아브람이 야웨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여정을 행한 일은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오늘날보다도 이동 수단이 변변치 못하던 그 시대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힘든, 고생길입니다.

 아브람을 아비 집에서 떠나라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데 이 시점에 잠시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 ‘우르’를 떠나라 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그 땅이 우상 숭배의 땅이라고 말합니다. 또 조상들의 삶의 방식에 영향 받지 않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또 영적으로 ‘에덴’을 상기시키고 미래 하나님의 모든 구속받은 백성이 거할 공간으로 구별된 땅으로서 ‘가나안’을 현시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 동의할만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브람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떠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인도 속에 아브람과 함께하는 무리들이 길을 떠나면서 그 오랜 시간동안 무엇을 목격하며 또 무엇을 느꼈을까요?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 여행 좋아 하십니까?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해 보십시오. 생각만으로도 흐뭇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장소를 정하게 된다면 편안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장소를 계획했다면 각 장소에 기념할만한 것을 관광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아브람의 여정은 여행이 아닙니다. 관광이 아닙니다. 무언가 특이한 것을 보며 경탄하기 위한 관광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쫓아 행하였습니다. 그 길은 사방에 ‘바벨’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홍수 후 살아남은 조상들의 삶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에벨(셈의 후예)의 시대에 모든 인류가 시날의 평원에 ‘바벨’을 건설하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흩어진 역사적 사건의 장소를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땅(족속들)이 나누어지고 흩어지게 된 일이 벨렉의 시대(창10:25)에 일어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벨렉의 후손인 아브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건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요? 멀리는 지금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두 강의 근원이 에덴에서부터 흘러내린 강줄기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에 대해 공개적, 고의적 반역으로 ‘복’이 아니라 ‘저주’의 삶을 선택했을 때,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은혜언약의 약속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만들어 낸 역사는 은혜의 나라가 아니라 저주로 채워진 나라이고 그 퇴락한 흔적을 이 여정 길 곳곳에서 목격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아브람의 여정에서 그는 홍수 후, 노아적 교회에게 주신 통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흔적을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세상에 깊숙이 새겨진 죄의 흔적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성도여러분! 흩어진 인류가 만들어 낸 것이 고대 문명입니다. 그 문명을 꽃 피운 곳 중 하나가 아브람이 살았던 ‘우르’입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어쩌면 ‘소 바벨’이라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많은 도시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고고학적 유물로 확인되는 지그라트, 이집트의 피라밑 등은 이 ‘바벨’의 흔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고안하고 만들어 낸 세상에서 주인되고 싶어 끊임없이 반역했습니다. 결코 온전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그리스도 없는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오히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을 끝없는 혼동으로 끌고 같습니다. 그것은 공허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만물의 기초이고 그의 나라만이 요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아브람이 목격한 것은 죄의 비참과 저주가운데 있는 인간의 문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기초가 되어 쌓아 올린 허상(虛像)의 문명을 보았습니다.
 창28장의 야곱의 돌베개 환상은 하나님께서 친히 요동하지 않는 ‘참 바벨’을 세우실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돌베개를 성전기둥 되게 하여 그 기둥이 하늘로 올라가는 층계가 되는 꿈입니다. 이 돌기둥, 바벨의 성취는 요1:51절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당신만이 ‘기초’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을 타락과 저주의 흔적이 있는 그 역사적 현장을 거슬려 이동하게 하신 목적은 신기루같은 인간들의 혼동과 공허한 문명들을 목격하면서 그것을 저항하고 ‘오직 신앙’ 이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업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는 결코 소멸되거나 무너지는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그분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모든 혼란과 문명의 자극들을 하나하나 거슬려 가면서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아브람이 어떤 문명을 건설했는지 그의 봉사와 섬김이 전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세대’와 전혀 다른 길, 오직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마다 야웨의 이름을 부르며, 이교도인 ‘짐승들’이 진리 안에 자유자가 되도록 복음전도를 행하였습니다. 인간이 기초가 되지 않은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기초인 그 영원한 나라에서의 치열한 삶을 아브람은 바벨의 후예들의 걸어가지 않은 ‘가 보지 않은 길’을 오직 신앙으로 걷고 있습니다. 이런 아브람의 생애를 누가 가볍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벨을 거쳐 끝없이 혼돈하고 공허한 문명을 추구한 그 세대에게서는 단 하나의 선함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철저하게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지식, 건강, 열정, 재물, 가정, 계획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다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손에 맡겨져 있는 은사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양의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든, 적은 것을 가졌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땅에 묻어 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믿음의 형제들과 비교하며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맙시다.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 오직 신앙의 길을 걷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허락받았지만 ‘가나안’ 자체가 약속의 땅은 아닙니다. 그곳은 이미 다른 거주자가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바벨 이후 흩어진 자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기초 위에 문명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끝없는 발전을 추구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혼돈과 공허한 삶을 살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신앙 여정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인 ‘가나안’이 아니라, 그 가나안에서 출발하여 야웨 하나님과 동행하며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보이시고 지시하실 땅, 그곳이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끝없는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이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바벨’입니다. 그것은 혼돈이며, 공허입니다. 그것은 저주를 더 채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일구어야 할 문화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나라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는 곳,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거가 된 곳, 더 이상 지시하시는 곳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복’이 되지 못하고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는 목적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그저 정규적으로 모여 예배하는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시하심을 고의적으로 듣지 않고 멈추어 버린 교회입니다.

 교회가 전체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옳고 세속정부에 모든 권리를 다 맡겨버린 것은 교회의 불신앙입니다. 우리시대에 우리는 올바른 정부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문화와 통치권을 바르게 일구어 세상에 전수함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결코 관념이 아닙니다. 약속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실재입니다.

 신실한 정치인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런 정치인을 발굴하고 지지해야 합니다. 그저 당 보고, 자기 지역이나, 출신을 보고 선출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직장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이 기대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일이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건설되는 ‘하늘의 바벨’이 되도록 내게 맡겨져 있는 공간이요 소명의 장소입니다. 좋은 대학은 없습니다. 학벌사회가 관료주의가 만들어 낸 서열이 있을 뿐입니다. 대학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웁니까? 아니 대학이 여러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소명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 있습니까?

 스스로 선생 되려고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재판장의 자리에 두고 누가 옳은지 경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결코 개인주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신앙을 상속받고, 그 신앙에 따라 일치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기 전에, 교회는 이것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기준이 더 앞섭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사사시대의 정신, ‘자기 소견대로’입니다. 복음의 약속은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그 성격은 은총에 기초해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과 한계가 완전한 순종을 이루지 못하여 때로는 뒤뚱거리고 걸을지라도 주님이 서로서로 돌보게 하심을, 직분자의 봉사와 섬김을 사용하여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진리에 굳게 서게 하심을 믿읍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으시고 세우신 예림개혁교회의 성도여러분! 여러분 또한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 인정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재이십니다.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쫒아 행하는 소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사용하는 것,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세상의 헛된 ‘바벨’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불의와 정욕의 시대와 싸우는 담대한 대장부들이 됩시다.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매일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언약의 실재의 공간이요 장소입니다. ‘오직 신앙’으로 주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멈추지 않고 행진하며,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견인되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결과는 주님께 맡기며 충실히 이 소명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복의 사람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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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죄의 공적 고백에 관해 관리자 2017-02-26 570
76 HC 1주일 관리자 2017-02-19 260
75 성찬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들을 줍니까? (2) 관리자 2017-02-12 343
74 성찬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들을 줍니까? (1) 관리자 2017-02-10 379
73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관리자 2017-01-29 344
72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관리자 2017-01-22 414
71 왜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있습니까? (2) 관리자 2017-01-15 246
70 왜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있습니까? (1) 관리자 2017-01-08 259
69 종교개혁 500주년 고신교회의 실천 사항 관리자 2017-01-01 455
68 당신에게 세례는 무슨 의미입니까? (2) 관리자 2016-12-25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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