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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4-06-02 (일)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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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2024년 6월 2일 제 1주일 설교
성경읽기 : 사40:1-11
설교본문 : 1주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오래된 책입니다. 교리문답은 1563년에 첫 출판되었고, 올해가 2017년이니까 적어도 455년이나 지난 오래된 문서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고대 문서가 여전히 오늘날도 교회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요?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직면해 있는 사회 현상과 ‘개혁’의 시대의 정서와는 불일치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놀라운 특성 중의 하나는 심지어 오래된 교리문답일지라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종교개혁 시대 이래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주목할만한 내구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인간의 견해를 포함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성경적 고백을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무오한 문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개정되어야 하고 항상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교회들은 여전히 성경의 교리에 대한 신실한 고백으로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입니다. 개혁교회들은 이 교리문답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되고 놀라운 요약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여전히 개혁교회들은 이 교리문답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이 교리문답은 개혁교회 안에서 그 기능을 다합니다.
 
우리는 이 신실한 신앙고백으로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얼마든지 답변할 수 있고, 답변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리문답 설교에서의 이 성경적 고백을 성경적 방식으로 설명하고, 또 이 고백을 오늘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교리문답 설교를 한다면, 이 교리문답 설교도 본문 설교와 똑같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 예배에서 본문 설교와 동일한 권위의 설교로 두 번째 예배에서 이 교리문답 설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다시 1주일로 돌아가서, 이 교리문답의 서론인 1주일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서론 주일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1주일은 전체 교리문답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 1문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입니다. 우리 교리문답은 계속해서 위로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특별히, 이 교리문답은 “유일한 위로”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 교회의 유일한 위로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라는 주제로 1주일의 설교를 선포하려고 합니다.

첫째, 이 위로의 확실성.  둘째, 이 기쁜 위로 가운데 사는데 필요한 지식.

첫째, 이 위로의 확실성

우리는 1주일에서 “위로”라는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교리문답의 저자들은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위로”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아마도 저자들은 이 단어를 그 시대의 처참한 상황 속에서 사용하려고 선택하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고, 많은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단어는 또한 성경적인 말이고, 이 위로의 개념은 성경적 개념입니다! 또한 위로는 우리 모두에게도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용기를 북돋우어 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로란 말은 고통과 슬픔과 환란과 상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위로란 말은 위로하는 몇 마디 말 정도가 아니라 참되고 지속되는 구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고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켜주고 미래의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경험으로 이 위로를 제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을 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위하여 해주는 것들은 우리에게 아주 작은 위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위로를 말할 때, 사람들은 상당히 냉소적으로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참된 위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상황은 참된 위로가 발견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로는 확실한 실제가 아니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어떤 불확실하고 비실제적인 말로 이 위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위로가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교리문답은 “유일한 위로”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유일한”이란 말은 “독특하고”, “배타적인”이란 뜻입니다. 이 위로는 교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위로입니다. 오직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1주일에서 고백되고 있는 내용 전체가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위로는 하나님이 언젠가 나에게 구원을 주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실을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고, 소유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죗값을 지불해 주셔서 나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인내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나의 위로입니다. 우리는 이 위로를 꽉 깨물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또한 바로 이 위로는 전체 교리문답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개혁교회의 신자로서 우리는 너무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한 우리는 너무 쉽게 성찬에 참여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너무 쉽게 구원을 확신하고 관습적으로 매주일 성찬에 참석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문제들은 단순히 관습과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회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실제를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실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에 근거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1주일의 핵심적 진리이고 교리문답 전체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은 항상 참되고 확실합니다.

여러분! 이 위로라는 말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 이 말은 화해와, 저주의 제거를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 위로는 생명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항상 어떤 문맥 속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함께 봉독한 이사야 40장 예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야웨께서 죄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당한 포로로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40장 1-2절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야웨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전쟁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악의 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가 제거되고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0절과 11절을 보세요. “보라, 주 야웨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여기서 위로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위로의 구체적인 내용은 죄악의 사함과 저주의 제거와 생명의 회복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행하시고, 그 일은 당신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40장에서 “유일한 위로”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이 이사야의 예언을 취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고,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 예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 1주일에서 교회는 성경 말씀에 따라서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기서 “몸과 영혼”이란 표현은 신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나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의 생명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해 주심으로 나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의 보호하심 가운데 나를 두심으로, 그리고 또한 당신의 성령을 주심으로, 내가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심으로 나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위하여 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악한 자의 능력 안에 있지 않고 사랑하시는 목자의 손 안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1주일에서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사단은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를 죄에 빠뜨리지 않습니까? 분명히, 사단은 우리의 삶에 죄로 영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우리의 삶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이 올 때에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사용하도록 사단에게 허용하실지라도 말입니다. 세상은 신자들이 영광의 기업을 상속받게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구속 사역과 아버지의 보존하시는 돌보심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존재도 아니고,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이것은 나의 유일한 위로이고, 매우 특별한 위로입니다.
 
우리는 이 위로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어떠한 폭풍이 덮칠지라도, 제아무리 무거운 짐을 질지라도, 엄청난 실망과 좌절이 올지라도 부딪치면서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 위로는 나를 강하게 해 주고, 나를 소망으로 채워줍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이 위로는 꿈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로는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성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리문답의 언어이고 우리 신앙고백의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강해집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 교리문답 52주일의 방대한 내용과 깊이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유일한 위로의 확실성 안에서 그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날마다 이 위로의 기쁨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란 사실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라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둘째, 이 기쁜 위로 가운데 사는데 필요한 지식.

우리는 1주일의 1문답에서 위로라는 하나의 주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제를 좀 더 상세히 진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2문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당신이 행복하게 이러한 기쁜 위로 가운데서 살고 죽기 위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서 “이 기쁜 위로 가운데서”라고 말하는데, 옛 번역본에서는 “이 위로 안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해서”라고 번역되어져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정확하게 이 위로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참된 행복을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1주일에서 우리의 고백은 행복한 고백이고, 우리의 신앙은 기쁜 것이란 사실에 동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변의 소위 기독교인들로부터 개혁신앙은 사람을 편협하게 만들고, 개혁교회의 예배는 길고, 설교는 지루하고 따분하여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참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개혁교회가 무엇인지 살아보고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고백하는 우리는 참으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즐겁고 기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행복하고 기쁜 신앙이란 것이 사람의 감정적인 반응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항상 쉽게 사라집니다. 우리는 큰 감격과 처음의 행복으로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치고, 힘들고, 실망하게 될 때에, 우리의 기쁨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께서 마13장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 주실 때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20-21절입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처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그 기쁨은 사라집니다. 깊이가 없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 씨는 그 속에 뿌리가 없습니다.
 
우리 교리문답이 기록될 그 당시에도 많은 환란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개혁신앙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그 신앙의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즉 개혁신앙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도망자가 되거나 심지어 순교자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가운데에 이 위로가 기쁨이 되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리문답은 여기서 단순히 주제만 말하지 않고, 좀 더 깊이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기쁜 위로 가운데서 살고 죽어야 한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우리의 기쁨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면, 우리는 분명한 지식,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리문답은 특별히 지식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지식이란 말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식은 우리의 마음속에 교리문답에서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항상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충심으로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포함하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리문답에서도 지식이라고 할 때, 우리가 몇 가지 사실을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문의 답은 이러합니다. “첫째는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한가, 둘째는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는가, 셋째는 이런 구원에 대해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어떻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음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당연히 2문의 답을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얼마나 슬퍼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그렇게 괴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쨌든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세하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세한 명령은 회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원에 대해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그들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껍데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냥 교회에 왔다가 곧장 사라져 버립니다. 처음의 감격과 처음의 기쁨이 곧 사라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리문답은 만일 우리가 이 기쁜 위로를 지키고 구원의 행복 가운데서 날마다 살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를 알아야 한다, 즉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얼마나”를 알아야 하고, 머리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교리문답 설교는 중요하고, 주일의 두 번째 예배에서 교리문답 설교를 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규칙은 교회를 위해 정말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교회가 표면적이고, 빈껍데기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우리가 전체 구원의 교리를 배우고 구원의 교리를 부분적으로만 알지 않도록 해 줍니다. 신실한 교리문답 설교는 표면적인 기독교인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왜냐하면 교리문답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부요함에 깊이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우리의 삶에 많은 열매들을 맺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알아간다면, 우리는 구원의 놀라운 기적에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사역은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큰 구원에 대해 참된 감사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때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하고 받기 원하시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만 우리는 지혜와 순종과 거룩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필요한 지식 안에서 자랄 때에 우리의 기쁨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특별한 위로 안에 서 우리의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파멸 당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심지어 환란과 박해가 올 때에도 우리의 기쁨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이 특별한 위로 가운데서 우리의 기쁨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프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식을 계속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이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52주일 전체를 다시 깊이 파헤쳐서 배움으로 우리의 신앙이 더 깊어지고, 우리의 삶이 많은 어려움과 환란과 수고 가운데서 기쁨으로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유일한 위로”라는 아름다운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또한 우리의 비참, 우리의 구원, 우리의 감사라는 세 구분으로 아름답게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130편이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깊은 슬픔으로부터 나오는” 우리의 비참,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정을 충분히 용서해 주시는” 우리의 구원,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모든 내용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볼 때에 우리는 결코 구원의 확신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기쁜 위로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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