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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3-11-12 (일)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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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된 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심
확정된 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심
2023년 11월 12일 주일 오후 교리 설교
성경봉독 : 딛 3:1-11
설교본문 : 도르트신조 Ⅰ-7




 신조는 6조에서 ‘하나님의 작정'을 설명한 후에 이어 7조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선택’과 ‘작정’은 얼핏 생각하면 비슷한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단어의 뜻을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작정'이라는 말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엡 1:11)이라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하시겠다고 정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 반해 '선택'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택하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 이것이 선택입니다. 예정론에서는 '작정'과 '선택'이라는 용어를 만날 때 혼동될 수 있지만, 사실 일반 생활에서는 두 용어가 잘 구별됩니다. “나는 오늘청소를 하기로 작정했어."라는 말의 의미와 “나는 빨간색 옷과 파란색 옷 중에 빨간 색을 입기로 선택했어.”라는 말을 혼동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작정을 먼저 말한 후에 선택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선택이 작정에 따라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셨고, 또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나 유기는 무엇을 따라 된 일일까요? 당연히 선택이나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배울 때 항상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선택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대신 “하나님의 작정, 뜻,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7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목적이다!
 당연히 이 진술은 '정의'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선택에 다가설 때 우리는 선택 앞에서 '나'를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목적을 생각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를 향해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성상 자기중심적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나'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생각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 자신의 행복, 등 '자신'만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천당 갈 것이냐 지옥 갈 것이냐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배워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사랑을 알게 되니까 우리의 시선이,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두운 눈을 겨우 뜨고, 마치 새벽의 뿌연 어둠 속에서 책장을 넘겨 미명에 비추어 진리를 읽어 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씀을 읽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향해 나아갔더니 거기 선택의 문제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말씀이 이 7조의 첫 문장, 곧 “선택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목적이다.”라는 문장이며, 이야말로 우리 선배들이 우리보다 조금 앞서서 선택 앞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법을 말씀으로부터 배운 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신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고백할 때 이렇게 진술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원래의 순결함으로부터 죄와 파멸로 떨어진 모든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순전히 은혜로 확정된 숫자의 구체적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이 고백은 읽는 것만으로도 매우 감동적입니다. 먼저 이 고백 안에는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우리'라는 두 단어에 강조점을 두어서 앞 문장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순결함으로부터 죄와 파멸로 떨어진 우리
이것이 신조가 말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동시에 신조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하나님께서는"입니다. 그리고 동사는 "택하셨습니다" 입니다. 그렇다면 주제가 선명해집니다. 죄와 파멸로 떨어져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주권적이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 문장들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우리’와 ‘하나님'의 주제를 디도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도서 3장 3절은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는 “어리석”었고, “순종하지 않았고, 온갖 행악에 물든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나타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4-5).

 이 말씀의 연결은 우리가 '원래 어떤' 이들이었는지와,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구원받게 되었는지가 한꺼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어리석고, 순종치 않고,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던 이들이었습니다(딛 3:3). 여기에서 “행락”이라는 말은 '쾌락', '육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디도서는 “쾌락을 즐겼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쾌락에 종노릇했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산 것입니다. 쾌락을 좇고, 정욕을 따라 살고…. 그런데 그게 쾌락에 종노릇, 사탄에 종노릇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악독, 투기, 가증, 피차 미워함 .… 이런 방식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납니다! “사람 사랑하심”이라는 말은 꽤 정감 있는 표현 같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두 번밖에 안 나옵니다. 여기 디도서 말고는 사도행전 28장 2절에 나옵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이 “동정”이 “사람 사랑하심"입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사랑'이라는 '필레오'와 '사람'(헬. 안트로포스)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다른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표류해서 겨우 살아남은 바울 일행들에게 거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불쌍한 마음에 불을 피워 주고 따뜻한 물도 주고 음식도 좀 주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보수를 받을 것에 대한 계산이나 생각이 있어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 사랑'입니다.

 이 사도행전의 상황을 다시 디도서에 투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불쌍한 모양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이 드셨다는 것입니까? 불쌍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측은지심, 자비함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서 길을 잃은 강아지를 볼 때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그런 것이 다 하나님이 원래 가지신 마음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불쌍하셨다는 것입니다. 쾌락의 종이 되어 악독과 불의 가운데 살고 있는 인생이 가엾으셨던 것입니다.

 딛 3장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이 "사람 사랑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유명한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사랑하사"의 "-사"는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은 결과입니다. 무엇의 결과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곧 '사랑'의 결과입니다.

 이 선택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우리가 어떻게 다른지가 그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 확정된 숫자의 구체적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신조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배경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장이 있습니다. 오류와 반박 1번을 보겠습니다.
 오류: 믿고자 하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믿음의 순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구원으로 택하신 작정의 전부고 전체다. 이것 외에 다른 작정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았다.
 반박: 이 오류는 교묘하게 속이는 것이고, 성경의 교훈과 명백히 어긋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선언할 뿐 아니라, 확정된 수의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택하셨다고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견인을 그 택하신 자들에게 내려 주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함이라”(엡 1:4).

 오류만 갖고서는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울 수 있지만 반박을 보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장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실 때 "확정된 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확정된 숫자”를 말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선택이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선택이란 '구원받을 조건을 정하신 선택'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종덕,심정숙,이서진,이우진’ 등 이렇게 구원받을 구체적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고 믿는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커트라인을 그어 놓고 “이 선을 넘어오면 구원해 주겠다."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조건만 정하셨습니다. 사람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말하는 선택과 우리가 믿는 선택을 간결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조건'을 선택하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셨다고 믿는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궁극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는 '사람의 결정'이 더 중요합니다. '자유의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 때문에 '조건을 정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정해 버리면 모든 결정권이 하나님께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머물 곳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조건만 정하셨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조건만 정하셔야, 실제로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고 여기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사람 이해’도 들어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사람 이해'는 어떤가요? 그들의 주장을 보면, 거기에는 ‘논리성'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에 대한 이해'는 없습니다. 차가운 조건만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따스한 마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디도서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우리의 중생, 곧 '구원받음'이 무엇에 기초해 있음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우리 구원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이 “사람 사랑하심”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은 건조합니다. 거기에는 시험장에서의 절대평가, 곧 “이 점수를 넘지 않으면 너는 가차 없이 아웃이다!"라는 객관적인 면만 있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한없이 조건을 낮추시고, 배려하시고, 사람의 어리고 약함을 이해하려고 하시는 마음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각 사람, 하나하나를 선택하신다.”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감동을 줍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절)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절)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받은 이들이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나에게 주셨다.”, “아버지는 너희를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은 '우리 각자를 대면하여 아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나는 선한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하나님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공상에서처럼 '조건만 아시고 백성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는' 무뢰한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은 내 이름을 몰라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천국의 문 앞에 갔을 때, "너는 누구냐?"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을 만나는 날, 주님께서는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아들아/딸아, 애썼다." 하시면서 우리를 맞아 주시고 안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을 깊이 묵상할수록 어떤 사람이 되어 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선택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다 정하셨어!”라고 하면서 결정론적인, 차가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선택을 진실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이 “불신자는 어차피 영원한 지옥으로 정해진 거야!"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따뜻한 마음과 온정 있는 눈길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좋은 선택 교리를 가진 신자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표현을 불편해 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진리를 제가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말이 싫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배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옳은 말을 한다'는 사실만 있고 '듣는 이가 진정으로 복음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으니 너는 듣고 기분이 나쁘든 말든 상관없어.”라는 태도는 '사람 사랑하기'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요?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지 못했을까요? 왜 내가 함부로 말하는 것을 통해서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왜 어느 순간부터 “교리를 배우면 건조해진다.”, “교리를 배우면 정죄하게 된다."라고 하는 말이 사실처럼 통용될까요?
 교리를 잘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교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교리를 참으로 가진 사람은 따뜻해집니다. 세상을 향해 호의를 베풀게 됩니다. 내 마음이 든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깔아뭉개기보다는 내가 낮아져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를 가집시다. 올바른 선택 교리를 가집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셔서 내가 교회 안에 그분의 자녀로 있게 된 그 사실로 인하여, 내 주위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 가도록 합시다. 이것이 '조건이 아니라 사람을 택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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