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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3-11-05 (일)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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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작정과 시간 집행
영원 작정과 시간 집행
2023년 11월 5일 주일 오후 도르트신조 설교
성경본문 : 출 3:6-12; 행 15:12-18
설교본문 : 돌트 Ⅰ-6




최근 읽은 책에 벽돌공 아버지를 둔 신학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일터에 따라다니면서 벽돌공으로 일했는데, 아버지가 여든이 넘어 돌아가시고 나서 쓴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가로줄 눈이 균일하고 세로 이음매에 빈틈이 없이 잘 지어진 벽돌 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저를 가르치셨는데, 아버지의 인생에는 그런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순전한 온유함은 한 가지 기술로 삶을 연마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미적 감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벽돌을 대충 쌓을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벽돌 작업을 보면 그렇게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저자가 아버지의 벽돌 쌓기를 ‘온유’와 연결시킨 점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돌덩이를 잘 쌓기 위해서는 다음번에 놓을 돌덩이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돌덩이 하나하나를 봐야 합니다. 돌덩이 하나하나를 그렇게 보려면 개별적인 것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제 아버지의 인생은 바로 이런 겸손으로 가득했습니다.

앞서 글이 아버지의 벽돌 작업을 '온유'와 연결시켰다면, 방금 이 글은 벽돌 쌓기를 '겸손'으로 본 것입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곧 하나님의 치밀한 세계, 잘 감독 되고 관리된 세계는 한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데, 저자는 그중의 어떤 한 꼬투리를 깨달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벽돌공으로 살아가도, 잘 들어맞게 반듯하게 놓인 벽돌들의 일렬을 보면서 성취감은 느끼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세계에 심어 놓으신 비밀, 즉 '치밀한 구성의 아름다움'은 전혀 못 느낍니다. 이런 사람은 일에 있어 완벽주의자는 될 수 있어도 '신자'는 못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상 한 모퉁이의 작은 일 하나(설령 그것이 벽돌을 쌓는 정도의 사소한 일일지라도) 속에서라도 세밀함에 몰두하는 것을 통해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온유나 겸손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직업과 관련해서 “내 일을 통해 주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라고 물을 때, 거기에 대한 대답을 “내가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여기 있는 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야!" 따위의 어리석은 대답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한 부분에 두실 때,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일들 중 단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세상을 방대하고 치밀하게 지으셨습니다. 초밥 기술자가 손의 온도를 조금 더 낮추고 밥을 어떻게 쥐는가를 통해 지극히 세밀한 혀의 미각 차이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것은 불신자의 눈에는 그저 '직업에서의 장인정신'에 불과하지만, 신자의 눈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심어 놓으신 비밀을 발견해 가는 과정입니다. 용접 불똥을 조절해서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갖는 용접 자국을 만들어내는 일 또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의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평생을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한 결과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기계를 따라가는 이들의 손을 보고 경탄하곤 하는데, 이런 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분야, 한 직업에서 이 정도를 해 내는 데에만도 수십 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를 해 내는 데에도 한 사람이 모든 정열을 쏟아 수십 년을 매진해야 겨우 그 비밀을 조금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을 방대하고 정밀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계조차 우리가 다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리고 '세계 이해'가 그 정도라면, 그런 우리에게 그야말로 하나님의 비밀인 '작정'을 말하는 일이란 얼마나 기이한 일이겠습니까!

영원 작정과 시간에서의 집행 : 그 함의

6조에 들어서서 신조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작정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첫째 교리 전체를 볼 때 7-14조에서는 '선택의 작정'을 다루고, 15-16조에서는 ‘유기의 작정’을 다룹니다. 그리고 두 조가 더 나오고 첫째 교리가 끝납니다. 그렇게 볼 때 6조는 선택과 유기라는 '예정 전체를 위한 주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목에서도 이미 잘 드러나듯이 6조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는 주제 전체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6조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선물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데, 그러한 일은 그분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베푸실 때, 신조의 표현을 따르면 이 선택하심은 “시간 안에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신조의 첫 문장에서 “시간 안”과 “영원”이라는 두 대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원부터의 작정

우리는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에 그 지점을 두고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5장 18절은 하나님의 작정을 영원에 두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_행 15:18

이 말씀은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다녀온 후에 예루살렘 공회가 모였을 때 이방인들 역시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장면 중에 나옵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되는 일이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에서부터 말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로부터"라는 말은 개역한글판에서 그렇게 쓰였으나 개역개정 성경에서도 고쳐지지 않았는데, 원뜻은 '영원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편입되게 될 것이 '영원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또한 비슷한 내용입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_엡 3:11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부터' 있었던 것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부터 있던 것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습관적인 말이거나 우리의 논리적 추론에서 비롯된 말이 아닙니다.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부터'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심을 얻어 백성되는 일은 분명히 영원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통하여 된 것입니다. 무계획적으로 대강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치밀하게 우리를 건지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시간에서의 집행

다음으로 신조가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는 “이 작정이 시간 안에서 집행된다"라는 주제도 생각해 봅시다. 단순히만 생각하더라도 이는 매우 합리적인 결과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영원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이를 시간 안에서 실행하십니다.

“시간 안에서"에서의 “시간”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 '하나님의 우리들을 향하신 선하신 뜻이 실현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작정을 계획만 하시지 않으셨고 실행에 옮기시는데, 이 실행을 '시간 안에서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조는 이것을 “시간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선물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묵상할 때 '영원부터의 작정'과 '시간 안에서의 집행'이라는 내용을 묵상하는 것은 각각의 요소에서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영원부터의 작정'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이 치밀하고 상세하며 우리로서는 그 파악이 어려울 정도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동기가 됩니다. 작정을 '영원부터'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받은 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크고 놀랍다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래서 칼뱅 선생님은 기독교강요의 예정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를 합당한 만큼 겸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느끼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듯 영원부터의 작정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놀라운 사랑을 밝히 깨닫게 해 줍니다.

둘째로, 이 일이 '시간 안에서 집행' 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추상적인 하나님을 상정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실 때 항상 그분의 행하신 일을 통하여 만나심을 발견합니다. 이 행하심의 근거는 대개 '언약'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합시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 주십니다.

첫째,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6절).
둘째, 세 동사가 이어 나타납니다(7절). '보았다', '들었다', '알았다’ 이 절을 완전히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셋째, 그다음, 동사 "내려오다가 나옵니다(8절). "내가 내려온다, 그들을 건지기 위하여“

출애굽기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듣고’, ‘아실’ 때, 행동을 동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아신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내려오셔서! 구원(건지다)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적군들과 싸울 때도 여호와께서 '용사이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때를 얼마나 많이 발견하게 됩니까? 홍해 앞에서 애굽 군대에게 뒤를 쫓길 때 그 군대를 불기둥으로 막으신 분은 하나님이셨고(출 14:19-20),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여리고 성을 칠 때 친히 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수 6장).

출애굽기 19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그들과 공식적인 언약을 맺기 위한 절차를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5-6절)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앞에는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으며,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느냐?”(4절)가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을 이 시간 속, 이 역사 안에서 '집행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부터의 작정을 찬송했듯이, 시간 안에서의 집행 역시 찬송해야 합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역사 안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작정을 말할 때 자칫하면 우리는 추상적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구원의 하나님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눈에 보이지도 않게,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저기 잘 모르는 낙원으로 휘리릭 데려가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하드라마나 장대한 서사시에서처럼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싸우시고, 역사하시며, 일하시는 방법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구체적입니다.

즉 '시간 집행'이라는 주제는 '영원 작정'만큼이나 우리로 하나님을 찬송케 만드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몸을 입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처럼 이 물질 세계 속에서 싸우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작정을 이루십니다!

유의할 점

도르트의 선배들이 '영원 작정과 시간 집행' 구도를 명시한 이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시간을 '인간의 행위가 있는 시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의 의지가 '구원의 시작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영원 작정과 시간 집행'을 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원부터 작정한 하나님만이 오직 구원의 절대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것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도르트의 선배들은 '영원 작정'을 말함으로써 모든 구원의 기원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르트의 선배들이 확고하게 천착하였던 이 '영원 작정과 시간 집행'이라는 가치를 확고하게 잘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원’과 '시간'이라고 표현할 때에는 인간 언어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맹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신중하게 다루는 이들은 이런 점에도 유의를 기울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몇 가지 생각해 봅시다.

생각의 하나님: '지성이 의지에 앞선다'는 기독교적 주지주의

‘영원'이라는 주제에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계 때문에 오류에 빠지게 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영원’이라는 개념을 ‘시간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영원부터 하나님이 작정하셨고 시간 안에서 집행하신다.”라고 말하면, 반드시 이것을 '선후 관계'로 이해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집행은 '뒤의 일'이고 작정은 ‘앞의 일'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작정을 하셨고, 후에 이 작정을 집행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동을 할 때 먼저 생각을 한 후에 움직입니다. 당연합니다. 어느 누구도 뇌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이러한 사람으로서 이해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별 생각없이 이 전후 관계를 대입하여 생각해 버립니다. 작정이 먼저, 집행은 나중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면 '전후'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이란 '시간 전이 아닙니다. '영원'이란 '시간 없음'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최초에 빛을 창조하셨을 때에야 비로소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곧 ‘창조 이전’인 영원이란 ‘시간 전'이 아니라 '시간 없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영원부터 작정하셨다.”라는 말을 읽을 때 '시간 전'에 우리를 작정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우리를 작정하셨다는 말의 뜻은,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지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 우리가 파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시점에 우리를 향하여 작정하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작정을 전후 관계로 읽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시간의 틀 속에 매인 이런 오해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후에 행동하는 분'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의 하나님

첫째,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시고 후에 행동하시는 분'으로 만들면,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생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생각의 하나님'이 됩니다. 유해무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플라톤주의의 이데아 이론이지 성경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요? 다시 앞에서 배운 성경의 하나님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자신을 ‘관념’으로, ‘추상적’으로, ‘생각’으로 제시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 '실체 없는 사상'으로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의 생각을 구원하였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이런 구원론은 영지주의에 가깝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행동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구원론이 이러하다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을 추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작정 역시 추상적인 무언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작정을 추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라고 하면서 “그것은 확정된 설계 명세서로서 이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작정을 '시간적 순서, 인과관계'로 이해하면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약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스킬더는 이것을 그나마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매순간, 계속해서 작정하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매 시간마다' 작정하시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슷하게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는데, 이 역시 '우리의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시간 속에 사는 우리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초월하여 시간의 모든 단면을 동시에 대면하실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는 '먼저 작정, 후에 실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매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조성자

둘째로 '생각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시고 후에 실행하시는 분’으로 보아 버리면, 반드시 하나님은 죄도 '먼저 생각하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게 보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잠재적 죄의 조성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만큼만 말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말하지 않는데 우리의 논리적 퍼즐 조각의 순서를 따라가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진입로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예정을 말하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까지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생각의 하나님'이어서는 안됩니다. '생각의 하나님'일 때는 '먼저 생각되고 후에 실행되는 것'을피할 길이 없고, 반드시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원 칭의: 신자를 수동적으로 만듦

또 한가지 다른 문제점으로 ‘영원 칭의'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네덜란드에서 논쟁이 된 것인데, ‘영원 칭의'라는 것은 예정을 극단적으로 생각한 것이며 앞서 말한 '전후 관계'를 그대로 도입한 것입니다. 영원 칭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에서부터 미리 예정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애초에 멸망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의롭게 된 일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모두 다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이런 구도에서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게 됩니다.

신자의 의롭게 됨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멸망 중에 있다가 어떤 시점에 그리스도를 만나서 의롭게 되는 것이 근본적으로 아니게 됩니다. 애초에 그는 의롭게 될 것이 다 결정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신자가 의롭게 되는 것을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영원 전에 칭의가 있었던 것을 단지 알아채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영원 칭의의 문제가 성경을 바르게 읽은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앞서 배웠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죄의 문제를 '실존적인 것'으로 가르칩니다. 성경은 “죄와 멸망은 이미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정을 전후 관계에서 앞에 있는 것으로 놓아 버리면 죄는 무력해집니다. 택자들이 죄와 멸망 속에 있었던 사실은 어쩌면 쇼가 됩니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영원 칭의는 신자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매 순간' 실현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해 놓으시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꼭두각시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무슨 수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에 살아야 할 삶이 시침, 분침, 초침 하나까지 모두 다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슨 수로 삶을 활동적으로 살아 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운명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 칭의의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운명론으로 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시간적 전후 관계로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작정에 대한 논의를 이런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밀고 가지 않고 겸손하게 성경에 의지했기 때문에 많은 오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뒤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작정이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것에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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