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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1-09-19 (일)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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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2021년 9월 19일 제 14주일 오후 설교
성경봉독 : 눅1:26-38, 신32:9-12
설교본문 : LD 14






우리는 지난 설교들을 통해서 교리문답이 예수님의 여러 가지 호칭들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특별한 이름들을 가지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1) 예수님께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고,
2)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통해서는 그분이 모든 구약 직분들의 완성자이심을, 그래서 그 직분적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고, 말씀을 전해주시며, 우리를 다스리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3)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독생자”이시며, “우리 주”라는 사실은 지난 주에 말씀을 통해 들었듯이 ‘주’라는 이름이 갖는 그 큰 은혜, 곧 만유의 주인이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사탄의 종 된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자로 살게끔 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의 그 다음 고백, 즉 예수님의 육적 탄생과 관련한 내용들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사도신경의 그 다음 구문은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신실한 내용을 기쁜 마음으로 함께 받도록 합시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고백은 기독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고백되었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사도신경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에서부터 나타나며 거의 모든 신앙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정녀 탄생 교리가 기독신앙의 가장 기본이며 핵심 중 하나라는 것을 쉽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잣대 중 하나도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느냐”입니다. 그 정도로 이 사실을 믿는 것은 기독교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교리를 박혁거세나 김알지, 주몽 등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신화와 같은 맥락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런 종류의 종교기원적, 신화적 인물이므로 후대의 교회가 예수님의 생애를 착색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이 아닌 일반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이런 이야기가 다른 신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일반적인 신화가 그 해당인물의 탄생 이후 최소한 수 백년, 보통 천년 이상 후에 씌어진 반면,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겨우 예수님 사후 20년 안에 기록된 내용들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즉, 이런 이야기가 통용되고 기록되던 당시에 예수님의 옆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때라는 말입니다.

고고학적으로 보자면 수천 년 된 자료들을 현대 학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역사상 그 어떤 기록도 신화적인 탄생을 그가 생존했던 때로부터 몇십 년 안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 유례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벌코프 같은 이는 “오늘날 동정녀 탄생 교리가 거부당하는 것은 성경적 증거의 결여나 교회적 재가의 부족으로 인함이 아니라 만연되고 있는 반 초자연주의적 풍조에 기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교회사적으로, 성경적으로, 일반적으로....모든 면에서 분명하고 확실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의 의의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의 의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무엇을 고백하는 것입니까?

1. 일반적 측면
예수님의 이런 종류의 독특한 탄생은 일반적인 몇 가지 의의들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쉽고 보편적인 이해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동정녀로부터 탄생함으로써 “인간의 유전되는 죄”에 해당하지 않고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옳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을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웠던 교리문답에서도 제 6주일의 16문에 보면, “중보자는 왜 참 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죄 없이 탄생하셨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인간의 유전되는 죄”로부터 예수님께서 동정녀 탄생을 통해 벗어나 계시다는 생각에는 역사상 오해가 있어 왔습니다.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당시의 금욕주의적 경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사람의 죄가 유전되는 이유를 “성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즉 당시의 경향이 성적인 것을 악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죄가 그의 핏속으로 유전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는 이유는 “성행위를 통해 임신이 된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죄의 유전이 다른 방식 때문이 아니라 성행위 때문에 유전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적인 것을 악하게 생각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지 성경적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타락 이전의 낙원에서도 사람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자녀 생산 방식이 성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이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결혼 자체가 애초에 “합법적인 자녀들을 통하여 인류가 번성하고 경건한 자녀들을 통해 교회가 번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성을 통해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동정녀로 탄생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인간의 죄를 유전하지 않고 태어나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죄 없이 태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동정녀 탄생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무죄하신 출생”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2. 더 나아가

하지만 예수님의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리는 “그분의 무죄하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관련한 교리도 담고 있습니다. 교리문답은 사실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35문의 제일 끝부분에서만 다루고 있습니다. 35문의 답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시면 교리문답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통해 “그분께서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리문답이 “동정녀 탄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죄탄생’ 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어떻게 인성을 취하셨는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를 통해 나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지 “그분이 죄 없이 태어나셨다”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을 통해,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는 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성령의 덮으심과 하나님의 아들

1. 하나님의 아들
먼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었던 누가복음의 말씀에 주목합시다. 누가복음 1장 35절 말씀에는 “성령의 덮으심”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제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심을 받으실 것”인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으심을 받게 되는 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그녀를 덮으셨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과적인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즉 성령의 덮으심이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으심을 받게 되는 동력인 것입니다.

교리문답도 동정녀 탄생 교리에 관하여 이런 입장을 반영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35문 대답의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의 연결을 잘 보십시오. 이 두 문단의 내용은 “성자께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인성을 취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즉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건에는 “성령의 사역”과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이라는 주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한 이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아들됨”과 “성령의 사역”이 기본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부분을 살피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처음이자, 가장 본질적으로 “아들됨”과 “성령의 사역”을 잘 결부시키고 있는 부분은 첫 사람 아담의 창조기사라고 생각합니다.

‘아들됨’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낳았을 때, 여러분은 사실 무엇을 낳은 것입니까?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아들을 낳는 것은 “자기와 똑같은 어떤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은 “형상을 낳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는 성령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말씀을 살피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창조물들을 지으시는 일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살피고자 하는 바만 말하자면 창세기 5장이 설명하고 있는 형상의 의미에 관해서입니다. 함께 창세기 5장을 펴 보십시다.

여기에 보면 창세기 기자가 의도적으로 ‘형상’이라는 말을 아담의 자녀들과 접목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아담이 자녀를 낳은 것을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정확하게 저기 ‘모양,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용했던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5장 3절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아담이 사실 “자기 형상”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1절과 3절은 인접 구절 안에서 연관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1절에서 이 말을 하고, 곧바로 3절에서 “아담도 형상을 낳았다. 그가 아들 셋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5장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사실은 ‘형상을 낳았다’라는 뜻이 됩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억하시지요? 성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에 다르게 나오는데, 마태복음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거꾸로 “그 이상은 누구요, 그 이상은 누구요...”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이 자녀를 추적해 내려간 식으로 기록했다면, 누가복음은 아버지가 누군지를 추적해 올라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누가복음 족보의 제일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족보의 마지막인 38절에 보면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끝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이상이 하나님이다 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담의 아버지,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것을 사람이 아들을 낳은 것처럼 말씀합니다. 곧 ‘아들’은 형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살피고자 하는 목적, 곧 성령과의 관련성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형상인 인류를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창조기사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사람만 독특한 방식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만드셨지만, 그들 모두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시지 않으셨고, 오직 사람만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에게 하시지 않은 행동을 딱 한 가지를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지칭하기를 “생령이 되었다”, 즉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동물들이 ‘육’이라면, 사람은 “살아있는 영”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됨”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됨이 나타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구별점은 “성령께서 그에게 불어넣어졌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 곧 아들이 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불어넣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아들됨”이란 “성령의 사역”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어졌다는 증거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탄생기사를 허투루 읽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인과 관계가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너를 덮으시리니.....나실바 거룩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 말씀에 “아들됨”과 “성령”과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도 그분께서 이 땅에 성육하셔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을 때, 거기에는 “성령의 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이 나타납니다.

2. 성령의 덮으심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령이 너를 덮는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단순히 수사법적인 표현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성령이 덮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1) 다시 창조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창조는 사실 “성령께서 덮으시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여기에서 우리는 혼돈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수행하실 때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사역하고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운행한다”라는 표현은 “버스나 지하철을 운행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신명기 32장 11절과 함께 여기, 딱 두 군데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2장 11절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신32:11)

여기서 ‘운행하다’와 같은 단어는 “독수리가 새끼 위에서 날개를 너풀거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창조시에 성령께서 ‘운행하셨다’라는 말은 단순히 휙 지나가신 것이 아니라, 혼돈 가운데 있는 이 세계를 독수리가 새끼 위에 날개짓을 하며 덮듯이 그것을 덮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사역이 “성령의 덮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창조 때 사역하셨던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지으시는 일에는 어떠하셨습니까? 우리가 방금 읽었던 신명기 32장의 말씀은 모세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독수리의 날개침”을 말하실 때, 그것을 “이스라엘이 자신의 백성이 됨”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하십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32:9-11)

이러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것이 마치 창조시에 성령께서 세계를 품으신 것처럼 자기 백성들을 품으시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광야에서의 자기 백성의 보호도 창조 사역과 유사한 성령의 심혈을 기울인 사역임을 연결해 줍니다.  

3)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여기에도 창조시의 성령의 운행하심과 신명기의 이스라엘 백성을 덮은 하나님의 날개와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룻이 보아스의 보호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일련의 상황에서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2) 그리고 룻은 타작마당에서 보아스의 이 말대로 똑같이 행동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룻3:9)

룻기에도 “성령의 덮으심”과 같은 요소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덮으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3.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그러므로 이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성령이 마리아를 덮었다”라는 표현을 발견할 때, 그 말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창조사역”, “성령의 강력한, 심혈을 기울인 사역”임을 알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취하셔서 “이 땅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을 때, 거기에는 성령의 강력한 열심, 성령의 산파적 역할이 있었습니다.

적용 :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그러면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 동정녀 탄생 사건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된 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교리문답은 36문에서 바로 이 질문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나의 죄를 그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 줍니다.”

이 구절의 신앙고백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로 탄생하신 사실”을 그냥 단순히 “신비한 얘깃거리” 정도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단순히 “예수님은 그러셨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으로만 그치지도 않습니다. 교리문답은 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시킵니다.

교리문답이 동정녀 탄생을 우리와 접목시키는 고리는 “우리의 죄”와 “그분의 순결”입니다. 그리고 이 두 상반되는 내용 사이에 다리를 놓는 표현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 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죄인이고, 그분은 순결하신데.....그 죄인됨과 순결함 사이가 단순히 차이점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중보자이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순결을 사용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셨을 때, 그 산파 역할을 한 것이 성령이라는 점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동정녀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케 하신 성령께서 그분의 탄생에만 그 사역이 머물렀습니까? 순결한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머물렀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와 예수님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같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님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의 이 구절에서 성령의 사역을 발견합니다. 성령께서는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일에서 산파 역할을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인간인 마리아를 덮으셨기 때문에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아들됨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누구의 어떠한 사역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함께 얻을 수 있었습니까? 여기에도 역시 산파 역할을 하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도 창조 때에 세상 위에 날개를 펴서 덮으셨던 것처럼, 첫 사람 아담에게 불어넣어지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출생, 곧 중생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심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덮으심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나와는 관계없는 그리스도께만 관계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의 근본적인 모델인 것입니다.

 정 리

오늘날은 성령론에 있어서 혼돈이 많은 시기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성령론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심으시는 사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와 분투하면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듬어지면서 우리는 그 구체적인 일들을 누구의 힘을 통해서 합니까? 죄악된 우리의 본성을 통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하게 하시는 데 산파 역할을 하신 분, 첫 사람 아담을 출생케 하시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까지 출생케 하신 분, 그 분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산파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났고,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매일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 이해를 갖는 것이 성령론의 기초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신자의 새롭게 태어나고 유지되는 삶이 역동적인 성령의 사역에 기초해 있음을 깨닫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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