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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10-25 (일)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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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다.
2020년 10월 25일 주일 오후 설교
성경본문: 시편 10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벨직신앙고백서 1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설명하는 단어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단어만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에 대해 ‘불가해하시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가해하시다는 말은 우리의 이성의 이해력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에게 계시하셨지만 우리의 이성의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봉사해야 합니다. 단지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죄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의 육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빠릅니다. 우리의 이성은 모든 정보를 원하는 방식으로 듣고 취사선택하여 자신에게 우리한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죄로 기울어진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본래 우리의 이성은 판단의 기준이 아니며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의지하여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만 제한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불가해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선하심도 우리의 이성의 사고력만으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심을 이해한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단순히 바른 이해력을 우리의 머리에 담아두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심에 대해 이해했다는 말은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우리의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삶의 토대와 우리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결과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지식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이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 세상의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에 어떤 참된 지식을 받아들이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느냐 아니면 자신을 중심으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지식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엄청난 변화를 요구합니다.

 신앙고백은 단지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요구하며, 선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계시려고 자신의 장막을 저 멀리 하늘이 아니라 실제 백성들 가운데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전체가 그 장막을 중심으로 배열되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12지파가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성막과 함께 움직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한 치도 하나님을 고백하는 믿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때에 자칫 우리는 선하다는 개념을 우리의 관념속에 있는 생각이나 국어사전이나 사회적인 통념에서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선의 원천입니다. 선의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언제나 하나님만 선하십니다.

 벨직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는 증거본문으로 누가복음 18:19절을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 18:19-20절에서 어떤 관원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하신 대답입니다.
“[눅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하나님만이 선하다는 말씀하시면서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거룩한 요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십계명의 요구와 연결시켜 생각하도록 안내해줍니다.
[눅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십계명의 요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성이 착하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간음을 미워하시는 선한 하나님이시며, 살인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부모를 멸시하는 행위를 미워하시는 선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거스리고서 영생을 얻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선하시고 유일한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십계명은 그 하나님께서 어떤 죄를 미워하시는지를 분명하게 계시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리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안내해줍니다. 십계명에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낙원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과 적대감을 유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악은 끔찍하게도 미워하셨습니다. 악한 것을 얼마나 미워하셨는지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해줍니다. 선하시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셨습니다. 결코 죄를 지나치지 아니하십니다. 선의 원천이시므로 죄를 미워하십니다.

 에덴이 낙원이라고 하지만 거기에 두신 중요한 두 상징물을 보면 거기에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분명 생명나무가 있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해주지만 자동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해 배워야 하고 악한 것과 싸워야 하는 과업이 있습니다. 이런 낙원의 생활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요긴한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사탄에게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정녕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경고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담겨있습니다. 이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범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독하게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녀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할 분으로 배웠습니다. 첫 계시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며 죄인을 끔찍하게도 미워하셔서 지옥으로 던져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대해 적대감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도록 계시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는 필경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어 가장 참담한 지경에 떨어질 것입니다.

 아합을 선하게 여기심

 [왕상 21:17-29]  (17)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8)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19)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27)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28)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여러분 아합의 악행을 아십니까? 그는 많은 악을 행하였으며 반복되는 그의 행적으로 볼 때에 그는 악한 사람입니다. 그에게서 진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가 행한 잘못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을 이용하여 형제의 기업을 탈취하였고 거짓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는 죄질이 아주 나쁜 잘못을 범했습니다.

 아합은 우리가 가진 관념으로 볼 때에 나쁜 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행동들과 그 행동들의 양에 관심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여기 일회성으로나마 죄에 대해 보여준 적대감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범한 자신을 찢었습니다. 자신을 정죄하였습니다. 자신으로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왕으로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거절하고 마음을 낮추어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래 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가납하셨습니다. 아합이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싸우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포하셨던 진노를 거두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나쁜 왕으로 유명한 아합에게 신적인 권위로 내리신 저주를 거두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죄와 싸우는 아합을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보셨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며 자신을 한 없이 낮춘 아합을 열납하셨습니다.

 아합의 경우에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게서 좋은 면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까? 우리의 기준과는 다르게 자신의 죄에 대해 보여준 태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아합이 얼마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는가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죄를 얼마나 미워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는 죄를 미워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피 흘리기까지, 죽기까지 죄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죄를 책망하는 말을 들을 때에 끝까지 듣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징계를 받을 때에 복종하여 견디는 자라야 참 아들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비의 징계를 끝까지 견디지 않는 것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징계를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그런 고난들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여기고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징계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교회의 권징을 통해서 하십니다. 교회의 권징은 많은 사람들로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권징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멀리 피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죄를 미워하지 못하고 피 흘리기까지 자신의 죄와 싸우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 권징이 부당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죄에 비해 권징이 더 무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 권징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히브리서의 기자의 전갈대로 권징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대하는 증거입니다. 달리 말해서 권징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랑이야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에게나 베풀수록 좋다고 하지요. 그러나 권징은 더 견고한 언약의 줄로 묶여있지 않는 한 누구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론 나그네에게는 권고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은 그를 아들로 대하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동시에 그가 겸손히 교회의 책망을 듣는 것은 그가 참 아들임을 믿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에 그 책망을 달게 듣는 사람들입니다. 죄가 자신의 마음에 있든 이웃하는 형제에게 있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때에 자신을 미워합니다. 지옥에 들어가야 마땅할 자로 여겨 자신에게 적개심을 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반영한 선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악을 끔찍하게 미워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 없는 선함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본주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가 권징의 표지를 높이 세우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와 반립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그저 마음이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자신을 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로 기울어져 있고 실제로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에 던져야 할만큼 미워하시는 죄이지만 우리는 서슴지 않고 매일 범합니다. 우리는 그 죄를 하나님만큼 미워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때로는 죄와 싸우는 일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합니다. 이런 우리의 악함을 감추는 간교한 수단이 소위 말하는 선행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일수록 눈에 띄는 선행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꾸밉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그 미움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사랑이 많고 너그럽다는 모습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불의한 나라나 불의한 기업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많은 선한 일을 홍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죄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한 행위가 선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면 무엇이 선한 사람의 증거로 합당합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일, 죄를 꾸짖을 때 그 앞에 겸손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돌이키는 것, 이런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그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행위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자를 선하다고 아합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선은 우리의 판단 기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선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를 미워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조금도 옹호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고 기꺼이 죄에서 돌아서며 죄를 범한 자신을 옹호하지 않고 회개하는 이것이 진정 선한사람의 표시입니다. 죄를 범한 자신을 정죄할 때에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상대의 허물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그리스도가 아니면 지옥에 던져져야할 죄인 가운데 괴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참 교회의 표지를 우리의 조상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권징으로 요약했습니다. 죄와 싸우는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자신들 가운데 죄가 있다고 인정하고 죄를 물리치는 싸움이 있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죄를 미워하는 회개이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날마다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죄가 한시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선함은 이런 불결한 죄를 미워하는 태도를 잠시라도 그칠 수 없습니다. 죄를 극도로 미워하지 않는 선행은 인간적인 선행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은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회개입니다. 매일 죄에서 돌아서며 자기 지체를 죄에서 돌아서도록 봉사하며 죄를 회개하지 않는 지체를 몸에서 제거하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찬바람을 느낍니다. 당장 우리는 이런 사람을 사랑이 없다고 단정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여,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 106편의 긴 찬송을 우리는 예배 중에 자주 부릅니다.

 시편 106편은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로 찬송을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다고 말하는지 노래를 따라가 보십시오. 이 긴 시편을 읽어보시면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에 깊이 젖어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죄는 결코 벗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과 언약으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 선하신 아버지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끊이지 않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차라리 이방민족이 더 행복하고 잘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받지 못한 오래된 상처투성이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미워하셨다고까지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이 모든 역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즉각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다 망하였으나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악한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남기십니다. 이런 점에서 인자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을 포기해서는 아닙니다. 장차 오실 어린양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양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어린양의 대속언약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대로 다 갚지 아니하시고 남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늘 함께 갑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우리를 괴롭게 하시므로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죄를 미워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열납하십니다. 우리가 행한 여러 착한 일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의 삯이 영원한 지옥이며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우리의 죄의 삯이었다고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서 떠나는 회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날마다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된 회개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왜 우리가 죄를 이렇게 미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선하셔서 우리의 작은 죄라도 지옥에 던져야 한다고 판결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두운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와 싸울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그분처럼 분노를 쏟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죄를 어느 정도 사랑하고 심지어 죄를 감추기 위해 선한 행실로 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같이 죄를 미워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죄와 비참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비참을 보게 해줍니다.

 구약백성들에게 그토록 반복되는 죄를 위해 수많은 속죄제사를 마련해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합과 같은 사람에게서도 회개를 기대하시며 그가 회개할 때에 기꺼이 그를 용납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형제가 죄를 회개할 때에 마치 전혀 죄를 지은 것이 없는 것처럼 용서함으로 죄와 마귀를 대항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너무도 미워하여 지옥에 합당하다는 주님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옥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를 매일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형제가 회개하기를 지나치도록 기뻐하는 것이 진정 선한 백성입니다.

 벨직신앙고백서 1항에서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우리는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는 선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거룩한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을 죄를 미워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모습으로 이해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고 죄를 슬퍼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를 받으며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십니다. 이 고백은 우리로 지극히 선한 삶을 사모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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