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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10-04 (일) 15:48
홈페이지 http://www.hwc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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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2020년 10월 4일 주일 오후 설교
성경읽기: 삼상3:1-4:1; 마13:52
설교본문: 삼상3:1, 4:1




 우리 주님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명절 연휴를 보내고 가을의 초입인 10월 첫 주일 아침을 맞이합니다. 열심히 참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한 여러분을 축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올 한 해 우리의 상황은 코로나의 위기와 재난과 경제적 힘겨움 등 산재한 어려움이 그 어떤 해보다 가중해 고달프고 힘든 한 해였습니다. 그럼에도 예배를 귀히 여기고 참된 소망 안에서 믿음의 진보를 위해 힘써 달려온 여러분의 분투가 함께 한 해였습니다. 이런 여러분의 신앙 여정을 주께서 귀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오늘 오전 우리는 삼상 2장 후반부를 살피면서 엘리집에 임한 심판을 들었습니다.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떤 판단을 받았는지, 그리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자식을 더 귀중히 여겼던(25절) 엘리로 인해 그 집이 어떤 비극적 결말로 끝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 오후 우리는 3장을 살펴볼 것입니다. 특별히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엘리와 사무엘의 경우를 통해 대조해 볼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듣는 귀를 주시길 바랍니다.

 1. 이 단락의 핵심적 주제중 하나가 “듣는” 것입니다. 엘리는 그의 아들에 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2:22-23).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그의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다(25절). 대조적으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엘리가 “듣지 못할” 때 조차(3:10), 홉니와 비느하스가 귀를 막고 있을 때에도 사무엘은 계속 “경청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의 이름과 히브리 단어 “듣다”, 즉 이스라엘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사용되는 “쉐마” 사이에 연결점이 있습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신6:4-6).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심”을 상기시켜줍니다. 이는 사무엘을 통하여 갱신된 이스라엘이 주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게 될 것에 대한 사인입니다.

 2. 어떤 의미에서 준-제사장으로의 사무엘의 사역을 2장에서 설명하고 있다면 3장에서는 선지자로 부름받고 있음을 설명해 줍니다. 사무엘은 모세 이후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거명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소명은 모세의 부르심과 유사합니다. 주께서 이전 모세의 이름을 두 차례 부르신 것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십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모세가 대답한 것과 동일하게(출3:4)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모세처럼 선지자 사무엘 역시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신앙으로 말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3:1은 “이 시대에 주의 말씀이 희귀하였다. 이상이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준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백성들에게 말씀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없었으며, 제사장들은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말씀도, 이상도 이스라엘에게 없었지만 에봇(출28:15-30)을 입고 있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주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상을 널리 보이게 하는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 사무엘은 야웨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주의 말씀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3. 엘리의 소경됨을 3:2이 주목하며 이는 영적인 분별력과 온전한 판단력을 상실함을 말해줍니다(시11:4). 엘리는 신앙심이 깊은 한나와 실제 벨리알의 아들인, 홉비와 비느하스 간의 차이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또한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예언” 할 수 없었으며 이제 사무엘을 통해서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엘리가 마치 이삭과 같음을 보여줍니다. 노년에 눈이 어두워지게 된 이삭이 판단력이 없진 않았음에도 부도덕한 에서가 호의적으로 그를 대우하며 만족시켜 준 것을 즐겼던 것처럼 엘리 또한 그러합니다.

 비록 엘리는 그의 아들들이 행한 방식으로의 제사장의 직무를 남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엘리는 아들들의 타락의 열매를 즐기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엘리는 희생의 음식을 즐기면서 “매우 무겁게”, 살찌게 되었습니다. “무겁다”는 단어는 해석상 히브리어 단어 “영광”과 “존귀”와 같은 형태입니다. (“무거움”은 kebed, "영광“은 kabod 입니다.) 엘리는 주의 음식으로 자신을 살찌움으로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음식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큰 죄악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을 책망하는 일에 실패했음을 말씀하셨습니다.(3:13) 엘리는 아들들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너무 인색했습니다(너무 가난하게 책망했습니다)(2:23-25). 엘리는 그의 아들들이 간음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망에서 이 사실을 표현하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엘리의 책망은 아들들의 마음을 잘라내기에는, 죄를 도려내는 깊은 각성을 주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인 책망이었습니다. 최고의 죄를 금지하는 일에 대한 실패는 최고의 죄로서 심판받게 됩니다. 그 죄는 제물이나 예물로도 속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14절).

 4. 3절은 아직 여호와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소에 있는 등대를 말하며, 레위기24:1-4은 여호와의 궤 앞에 켜 두었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야 함을 말합니다. 3절은 아마 등불이 바깥 경계 위에 서 있음을 설명해 줍니다. 여호와의 집이 너무 황량하게 되어 등불이 꺼지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깜박거리고 있었으며 아직은 희망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빛이신 말씀을 받아서, 사무엘 자신이 이 어두운 시기 동안 살아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간직한 깜박거리는 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야웨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그 어두운 시기의 완전한 어두움이 이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 사무엘이 성막의 지성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이 책들에 사무엘이 성소 바닥위의 잠자리에 있는 그림을 제시하는데, 이는 본문의 사실과 다릅니다. 사무엘은 아직 제사장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아직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성소가 아니라 (성막과 달리 회막에는 이런 공간이 있었는데), 성전의 전용구역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장적 어법이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그의 아버지의 집에 거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주어진 야웨의 말씀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엘리의 집에 대한 두 증인의 증거는 반복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2:25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의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가버렸습니다. 그 예언적 말씀은 단지 그들이 더 강퍅하게 되었고 실로의 황폐함을 인 처 줄뿐입니다. 실로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간 이래 이스라엘이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일어난 일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실로가 전에는 황폐하지 않았으며, 제사장들은 다 죽지 않았으며,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불이 꺼질”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혐오스러운 행동은 야웨의 집과 대제사장의 집에 슬픔을 초래할 것입니다.

 5. 성도 여러분! 본문 15절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후 아침까지 누웠다가 새날이 밝았을 때에야 야웨의 집 문을 열고 엘리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까?

 그날 아침 선지적 부르심을 입은 후 사무엘의 행동은 희망을 갖기에 충분한 이유를 줍니다. 사무엘은 15절 엘리 앞에 가기 전 아침까지 기다립니다. 이는 심판을 설명하는 일이 새날의 시작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여호와의 날이 오는 것, 한나가 소망한 그날, 고귀한 자가 낮아지며 가난한 자들이 높아지는 날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또한 주의 집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상징적 행동은 여러 면에서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성전문 입구에서 봉사하던 여인들과 동침하였던 홉니와 비느하스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문 입구에 서서 이야기를 전해듣던 엘리를 대신합니다. 어떤 점에서 엘리와 두 아들 모두 성실하게 문 입구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사무엘이 신실한 문지기가 되어 새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주의 말씀을 들었고, “ 말씀이 널리 퍼져가도록” 그 문을 열었습니다. 전에 “주의 말씀이 희귀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시가 퍼져갈 수 없었습니다”(3:1). 그러나 이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습니다”(4:1).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께서는 신실한 제사장이요 신실한 선지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사무엘을 세웠습니다. 문 입구에서의 기도를 통해 출생한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기 위해 문 입구를 여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실로에 있는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습니다.
 여기에 '희귀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아주 귀하다' 는 뜻입니다. 언어적 뉘앙스가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이 들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사장의 부패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기울어져 있고, 엘리 제사장 시대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처럼 예배를 경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점점 우리 속에서 꺼져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 음성을 듣고도 처음엔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엘리에게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시기에 왔습니다"고 말합니다. 엘리 앞에서 성장했던 사무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현존하여 찾아오시는 경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엘리의 잘못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에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그 음성 듣는 것을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경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현상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가까이하는 자는 믿음의 비밀에 부요하고, 반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오히려 눈이 어두워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17절 이하에 엘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말해주는 사무엘이 나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모습입니까? 자신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기에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어야 할 자가 오히려 눈이 어두워 하나님 계시를 보지 못하고 그의 시종에게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신앙은 언제나 오늘의 모습이 중요하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경멸하심을 보여 줍니다.

 셋째,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며, 여호와를 존중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각 가정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미래는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삼상2:26 "은총을 받았더라"를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와 사람 앞에서 '선하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물론 이 시대정신이나 상황도 사무엘 당시처럼 어둡고 암담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 이 시대에 동화되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 모든 행동을 시대 탓, 환경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는 엘리 시대의 부패함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작은 불씨를 피우고 있는 한 사람이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어두운 옛 시대를 끊어내고 왕정이라는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통달하였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올 김용옥) 그는 하나님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으나,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살면서 이 시대를 비추는 작은 불씨가 됩시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혹 자녀가 주의 법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엄히 책망하여 말씀의 자리에 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에 굴복하기 위하여 말씀을 찾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3: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계속해서 사무엘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인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에게 언약의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성도들에게 이 은혜가 동일하게 임하는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오,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저울에 달릴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순결하게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75: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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