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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9-13 (일)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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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받은 고통의 시험”
“욥이 받은 고통의 시험”
2020년 9월 13일 주일 오후 설교
성경읽기 : 욥1,2,23장
설교본문 : 욥23:10-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고통임을 최근 우리는 뼈저리게 느낍니다. 오늘 오후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정리하며 바른 이해를 갖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여호와께서 욥을 시험하여 이르시기를, “ 세상에 욥과 같은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에스겔 선지자는 의인의 모범으로 노아, 다니엘, 욥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슴은 욥이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욥 스스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또 욥은 하나님 앞에 죄없는 사람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14:4)

 여러분! 분명히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이 성경의 표현은 욥이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욥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욥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적 교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런 의인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까? 만일 욥이 연약함으로 특징지어진 보통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재빨리 “그는 야웨께 징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당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경우는 그런 보통 사람의 경우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욥기가 쓰여진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에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시는 한 사람이 있다.” 이로 인하여 욥의 고난의 이유는 욥기의 중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욥의 고난의 이유는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모든 대화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그의 죄 때문이 아닐지라도 그런 심한 고난을 당하게 허용할 수 있는가? 욥의 친구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욥이 몇 가지 비밀스러운 죄를 숨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욥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해 형벌하는 것도 아니고 교정을 위한 채찍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많은 일을 행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모든 일이 욥에 반대하여 입증하는 것 같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욥의 원수로 바뀌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신 일을 아십니다. 이것은 다른 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의인은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시34:1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여러 가지 고난과 장애를 겪을 때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죄에 대해 나를 형벌하시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씨름합니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몇 가지 통찰력과 분명한 교훈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고난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아담이 죄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고난도 경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낙원에서 아담의 원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죄에 빠짐은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을 떠나기 전에 그들은 약속된 씨의 복음 곧 오실 구주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죄의 저주가 제거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저주를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짊어질 저주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고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고난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부터 나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에 대해 말할 때 첫 번째이면서 가장 중요한 구별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타락한 사람과 이 세상에 임하는 저주 아래 고난받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고난 받음은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는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오는 모든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슬픈 세상에서 많은 역경과 고통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생에서 우리가 받는 많은 고난의 이유들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정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징계인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징계는 정말로 우리를 회개하고 경건의 훈련을 하게 하려고 의도된 것입니다. 히12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하나님의 교정의 막대기로 인한 고난은 회개해야 할 개인적 죄와 연결됩니다. 잠언3:11,12절입니다. “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그러나 또 우리의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종종 징계를 의미하지 않는 시련들로 입증됩니다. 이와 연관하여 욥은 탁월한 모범입니다.

 욥의 고난은 특별한 개인적인 죄에 대한 교정과 징계로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 죄 때문에 징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욥의 세 친구들은 ‘인과율’의 법칙을 들이밀며 욥의 죄로 인한 징계라고 거짓고소하며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결코 욥이 그리스도처럼 흠 없는 온전한 자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욥이 자기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욥의 순전함을 증거하고 입증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런 예들은 성경에서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독실한 신자’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의 손에 고난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나중에는 옥에 갇히게 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요셉의 죄를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겪은 많은 고난들은 요셉의 신앙과 신실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주신 시련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길 신실한 신자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나 핍박을 받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은혜라고 불립니다. “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물론 때때로 고난의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지게 되어서 신자가 자신의 고난의 정확한 이유를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욥도 자신의 고난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욥이 고난의 이유를 알았다면 그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최종적인 결과를 알았더라면 고난 속에서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욥은 알지 못합니다. 욥은 스스로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했습니다. 욥이 자신의 생(生)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때조차도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심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의 고백입니다. 13장 24절,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욥은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16장 9절입니다. “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뒤쫓으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날카로운 눈길을 보내신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욥이 하나님께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찢으시는 자기 원수로 행하고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또 욥은 야웨께 이렇게 말합니다. 30:21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신다.” 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고난을 경험해야 했습니까? 모든 고난 중에 최악의 고통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돌이켜서 자신을 파멸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욥이 하늘 성전의 휘장 배후를 보고 우리와 함께 욥기 1장의 서론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욥은 자기 고난의 목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바로 욥의 신앙이 참으로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사단이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도전할 때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받은 많은 복과 또 이익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단의 빈정대는 말을 욥을 듣지 못했습니다. 후에도 욥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이것이 내가 너에게 고난을 허락한 이유이다.”는 직접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욥에게 “욥아, 네가 누구관대 내가 너를 다룸에 대해 질문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능자의 절대주권이 욥기 전체에 걸쳐서 강조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대하심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하지만 욥이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한 핍박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욥의 순전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증명되고 입증되기 위한 시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욥이 받은 그런 엄청난 고난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또한 고난과 고통에 의해서 증명되고 입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겪게 될 고난이 어떤 종류의 고난일지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그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니라 항상 순수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열매, 즉 승리로 인하여 고난을 우리의 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고난이 더 이상 저주와 형벌이 아니라 ‘복음’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단은 하나님 앞에 와서 욥을 고소합니다. 사단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1:9-11)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의인에게 복 주시고 그의 모든 소유를 산울로 두르신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께 “ 당신의 자녀들이 이익들 때문에 주를 섬깁니다. 욥은 이미 주로부터 복을 받았고 또 이익을 기대하여 당신을 섬깁니다. 욥은 당신을 위해 당신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신을 섬깁니다. 이제 욥에게서 당신의 복을 다 거두어 보십시오. 그러면 욥이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도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마치 이익을 얻기 위한 상업적 거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디모데에게 경고했습니다. 딤전6:5절입니다. “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정말로 우리 시대에, 특별히 은사주의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을 흥정거리와 물질적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보는 번영의 복음을 붙들고 있는 자들을 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경외하며 섬겼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사단의 도전을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모든 것을 다 빼앗겼지만 순전함 가운데 인내하여 야웨의 이름을 송축했습니다. “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1:21)
 그러나 사단은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 두 번째로 나타났습니다. 사단은 야웨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2:4,5)라고 말했습니다.

 사단은 욥의 살과 뼈를 치도록 하나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단이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욥의 몸의 한 부분도 고통없이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옥의 고통으로 욥의 영혼을 공격했습니다. 자녀들과 소유물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아내에게까지 버림받으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는 독설을 들었을 때조차 욥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욥의 순전함을 하나님께서는 아셨지만 욥의 순전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공적으로 입증되어야 했습니다. 욥기는 탁월한 한 신앙의 인물의 자전전 책이 아닙니다. 또 고난을 연구하는 특별한 문서도 아닙니다. 욥기는 우리의 위로를 위해 기록된 계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에도 즐거워하라고 가르치는 야고보는 이 욥의 경우를 예로 들어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약5:11절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여러분! 야웨께서는 욥에게 닥친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한 가지 목적을 이루려 했는데, 그 목적은 사단의 의도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야웨께서는 욥을 파멸시키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욥의 신앙을 공적으로 입증시키고자 했으며 욥에게 더 큰 복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받은 이 고난을 통하여 결국을 유익을 얻고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42: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극심한 욥의 고난 중에 위로자로 찾아왔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보면서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 욥아, 야웨께서 너의 죄 때문에 너를 벌하신다. 이제 너의 죄를 회개하라. 그러면 너는 다시 번영을 얻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친구는 말하길, “ 하나님은 결코 욥에게 불의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이 너를 벌하신다면 반드시 네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악인을 벌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감추고 있는 너의 모든 죄를 토하고 회개하라! 그러면 너는 잘 될 것이다.” 이제 친구들은 더 이상 위로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속이는 자, 사단의 도구가 되어 거짓 고소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인의 고난, 즉 대속의 고난에 대한 이해와 신앙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친구들의 정죄와 고소를 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욥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욥은 말합니다. 10절입니다.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재판관이신 하나님)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사단을 대리한 친구들의 고소에 응답합니다. 욥은 자기의 기소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법정에서 합당하게 시험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때 욥에 대한 고소가 거짓이라는 것과 욥이 정말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있다는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이런 욥의 확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옳게 판단해 주실 것에 대한 욥의 확신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이유에 대하여 여전히 알지 못하고 그래서 납득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욥은 계시된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루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욥에게 여전히 신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덮은 짙은 어두움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자신에게 계시하신 것을 더욱 더 붙잡았습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은 자신의 의에 매달리지 않고 야웨께서 자신에게 계시해 주신 길(말씀)에 매달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의 활동 시기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까? 욥은 족장들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욥은 아마도 이삭, 야곱, 나홀의 후손들, 우스 땅에 살던 아브라함의 형제들과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스는 나홀의 장자였습니다. 우리는 리브가와 라반의 역사에서 야웨께서 나홀의 집과 그의 후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31:53절에서 라반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나홀의 하나님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욥의 수명 또한 족장들의 연수와 비슷합니다. 그런 이유로 욥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니지만 야웨를 알았고 경외했던 집으로부터 출생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 욥이 자신의 믿음의 행로에 대해 말하길, 자신이 야웨의 길을 지켜 치우지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23:11,12절) 욥기는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기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시하셨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지만 모든 옛 예언들이 다 우리를 위해 보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홍수전에 살았던 선지자 에녹의 예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유1:14) 우리는 의의 전파자였던 노아의 설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벧전2:5)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들의 기록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야웨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26:5절에서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은 야웨께서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법을 계시하신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욥이 자신에게 계시된 주의 계명과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신앙하고 섬겼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욥은 신비신앙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시된 신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한 참된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이 있다고 상상하지 않아야합니다. 유일하신 한 하나님, 한 믿음, 한 복음이 있습니다. 욥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신앙입니다. 욥은 복음을 알았고 구속자에 대해 말합니다. 욥19:25-27절입니다. “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성도여러분! 고난 중에도 욥이 씨름하며 붙잡았던 신앙이 무엇입니까? 욥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욥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신비로운 방식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에도 욥은 치열하게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붙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12절).

 욥은 양식과 음료보다 더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원천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욥은 야웨의 길을 지켜서 치우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의 미로(迷路) 가운데서도 야웨의 길을 지켰습니다. 주의, 말씀을 붙들었기에 하나님의 승인을 확신했습니다. “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우리에게 캄캄하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33절에서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욥기 11:7,8절에서도 “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또 욥 자신도 26: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정한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라고 말합니다(창50:23).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지극히 적은 한 부분만 겨우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신비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은 것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너무나 성급하게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지 맙시다. 또 그렇게 고난받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맙시다. 오히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우리의 무지를 인정합시다. 다만 내게 대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조차도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시된 말씀에 반대되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래서 욥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루심이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는 것 같았을 때에도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로 우리의 환경이 복음의 약속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의인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불경건한 자들이 번영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신앙을 입증하실 것이고 주의 백성의 ‘의’를 정오의 빛같이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시37:6) 욥은 이 신앙 가운데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계시된 말씀에 의지하여 확고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세상을 향한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잘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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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신 계시 파루시아 2020-11-08 13
168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방법 파루시아 2020-11-01 17
167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다. 파루시아 2020-10-25 20
166 큰 잔치에 초청하시는 예수님! 파루시아 2020-10-18 35
165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붙이셨다. 파루시아 2020-10-11 38
164 사무엘아! 사무엘아! 파루시아 2020-10-04 34
163 교회는 회중이 예수님의 생각을 좇아 교제하는 곳이다. 파루시아 2020-09-20 45
162 “욥이 받은 고통의 시험” 파루시아 2020-09-13 39
161 표적으로서의 방언 파루시아 2020-09-06 35
160 방언의 구속사적 의미 파루시아 2020-08-30 30
159 방언에 대한 가르침 파루시아 2020-08-23 42
158 브솔에서 펼쳐진 참 교회의 모습 파루시아 2020-08-16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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