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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9-06 (일)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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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으로서의 방언
표적으로서의 방언
2020년 9월 6일 주일 오후 설교
성경본문 : 고전14:20-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제일 처음으로 우리가 배운 것은 ‘방언이 말씀은사’라는 점입니다. 또 우리는 지난 주일에 ‘방언이 어떻게 심판이 될 수 있는지’를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방언이 계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 바탕 위에서 함께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2절 중심으로 방언이 표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22절의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라는 말씀을, 불신자들에게 방언과 같은 신기한 기적들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믿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22절의 말씀은 방언이 일종의 ‘전시효과’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방언은 ‘신비한 영적세계’를 드러내주는 효율적인 수단이 됩니다. 실제로 방언을 강조하는 많은 사람들이 22절을 근거로 하여서 방언의 이러한 효능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통상의 이런 이해는 성경본문을 주의 깊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입니다.

22절의 바른 이해

 첫째, ‘표적’이라는 말에 주의할 것

 먼저 주의를 두어야 할 것은 22절 말씀이 방언을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이적’이나 ‘기적’이라는 말과 ‘표적’이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표적’은 ‘기적이나 이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말은 “상식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기적적인 일”이라는 의미보다는, ‘표시’, ‘징조’라는 뜻입니다. 즉 영어로 말하자면 mark나 sign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적’은 기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표시로 내일 죽은 자가 일어나게 하겠다”라고 하신다면 이는 ‘표적=기적’이겠지만, 기적이 아니더라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표시로 내일 비가 내리게 하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표적이긴 하지만 기적은 아닌 것입니다. 비는 늘 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성경에서 ‘표적’이라고 할 때에는 그것의 “기적적인 성격”보다는 “그것이 무언가를 표시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많은 표적들이 기적을 동반합니다. 요한복음에 표적이 많이 나오는데, 거기서 표적은 물론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표적이 반드시 기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적인 일들도 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포커스를 ‘신기한 일, 기적’에다 두지 말고, ‘무언가를 표시하는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22절의 말씀은 “방언은 신기한 일이다”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22절이 방언을 ‘표적’이라고 부른 이유는 여기서 방언이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한 징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표적입니까?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고 계신다”는 표적입니다.

 둘째, 23절 이하의 내용과 통상이해의 불일치

 그리고 22절의 말씀이 ‘방언의 심판됨’에 대한 말씀인 것을 확증할 수 있는 두 번째 증거는 2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23절 이하의 말씀 역시 지금 같은 맥락 안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점을 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통상의 이해는 방언이 ‘사람들에게 신기한 이적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전도를 위한 장치이거나, 적어도 전도까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기이하심이나 놀라우심”을 보여주는 수단이 된다라고 결론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지극히 객관적으로 2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3절 말씀은 교회가 모여 방언을 했을 때, 사람들이 ‘미쳤다’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방언이 불신자에게 보여지는 신기한 장치라고 생각할 때는 이 구절을 “방언이 신기한 현상이니까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언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 본문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의 증언은 이 방언의 기이한 현상이 불신자들에게 무언가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쪽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방언현상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르는 사람들은 이걸 보면 더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니까 오히려 사람들을 내쫓게 될 것이라는 쪽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22절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기서도 맞지 않습니다. 보통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할 때는 ‘좋은 쪽으로의’ 인식입니다. 방언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데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표적이다”라고 할 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이 23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방언이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금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고린도전서 14장이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관점이 이 22절과 함께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의아하게도 사람들이 왜 이 사실을 잘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2절의 말씀이 만약 통상의 이해대로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긍정적인 표징”이라면 왜 바울은 방언을 가급적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앞에서도 살폈듯이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의 우월함과 방언의 열등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22절을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봅시다. 22절의 내용을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기적의 도구이고, 예언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도구이다”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처럼 전도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바울이 서신을 쓴다면, 그 결론은 “자 그러니까! 더욱 더 열심히 방언을 해서 사람들에게 더 크게 전도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은 철저하게 예언과 비교되면서 가급적 방언을 하지 말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는 지금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불신자들에게 나타내는 이 일”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22절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이 22절의 말씀은 ‘방언의 표적으로서의 기능’,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방언이 신기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3가지 정도의 이유를 가지고 22절의 말씀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살핌이 꼭 있지 않더라도 성경을 문맥 안에서만 잘 읽을 수 있다면 명백하게 22절은 21절의 결론입니다. 방언은 ‘믿지 않음의 표적’인 것입니다.  

더불어 신자에게 있어서도

 더불어 신자에게 있어서도 이 사실은 같은 방식의 적용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제가 만나본 분들에게 “왜 방언이 필요합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는 그것을 ‘교회적 기능’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방언의 필요성을 “하나님을 더 깊숙이 만나게 된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영적 체험이다”라는 식의 대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신자에게 있어서도 통상적인 방언 이해는 “신기한 일을 겪음으로써 내가 좀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은 이런 방식으로 신자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를 통해 분명하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22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신기한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언가 더 나은 체험을 주신다”라는 점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신앙은 ‘심판으로 방언을 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능멸하고,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부터 이탈하여 감각적이고 기복적인, 하나님보다는 체험과 기적을 좇는, 가짜 신앙을 만들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역할
1. 방언이 계시은사임을 분명히 이해할 때 방언의 역할은 끝났음

 무엇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방언이 이미 종결되었다는 점입니다. 방언이 계시를 위한 은사라는 점을 우리가 분명히 한다면 이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있기를” 바라면서 “그 때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신앙적이고 경건한 것인양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 그와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완공하여 놓으신 건물을 보고, 아직 공사중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속의 역사는

1)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계시
2)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이 계시가 결정적으로 완성됨
3) 그리스도의 이후에는 이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의 풀이와 적용으로 나타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께서 구약 모든 계시의 절정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즉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빛나도록” 의도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편에서 그 “그리스도에게서 빛나도록 계시하신” 내용을 두고, 지금 또 새로운 계시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척하면서 “하나님은 그때와 똑같이 지금도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실 하나님을 높이려는 경건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누려보고 싶은 이기적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참된 경건을 가진 신자는 “이미 주신 말씀”과 “성취된 그리스도” 안에서도 충분히 “현재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충분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2-3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사자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졌을 때 그들을 지탱한 것은 “백 년 전에 주셨던 그리스도의 이적과 똑같은 것을 ‘다시’ 주심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기록된” 말씀을 붙들고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신교를 믿는 이들이 처형당하고 감옥에 갇힐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소망을 심어 준 것은 “새로 나타나 다시 계시를 주신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계시를 자신에게 ‘적용’함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말씀은사로서의 방언이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되고 있던 시대, 즉 사도들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계시가 직접적으로 임하는 때도 있었고, 선지자라는 직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가 지나고 말씀이 완성되고 난 이후에는 ‘사도들도’, ‘계시은사도’, ‘선지자직도 모두 중지되었습니다. 따라서 계시은사 중 하나였던 방언도 마찬가지로 중지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 계시를 쓰심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풍성한 계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해설하여 주심으로써 역사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함이 필요합니다.

2. 계시와 덕의 상관성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방언에 관한 역할은 더 이상은 없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이전의 설교들에서 방언이 가진 긍정적인 역할을 살핀 바 있습니다. 방언은 부정적으로는 심판을 드러내고, 긍정적으로는 1)모든 신자가 선지자 되었다는 점과, 2)바벨탑 저주를 푸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방언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더하여 방언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던 시대에 주어진 말씀의 특징을 통하여 방언의 교훈을 한 가지 더 살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한 가르침인데 유독 많이 등장하는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덕’입니다.

- 예를 들어 3절에 벌써 “예언하는 자는 덕을 세운다”라고 하였습니다.
- 4절에도 방언은 자기의 덕을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 12절에도 보면 방언을 구할 때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 17절에도 방언이 다른 사람의 덕을 세워주지 못한다고 하고,
- 26절에도 모일 때 찬송도 있고 말씀고 있고 계시, 방언도 있지만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합니다.

- 조금 다른 표현이기는 하지만 40절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품위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안에서는 제일 첫 절인 20절에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함으로써 방언을 사용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무지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 내용들을 다 총괄해서 보면 고린도전서 14장은 우리에게 “계시은사를 사용할 때의 필수지침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계시은사는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편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덕을 세운다”는 표현은 헬라어로는 ‘덕’이라는 말이 없고 그냥 ‘세운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말은 건축용어입니다.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말로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그냥 ‘교회를 세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방언과 예언이 사용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방언과 관련하여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오늘의 교훈 한 가지는 이 방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목표점이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왜 사도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방언의 열등함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방언은 통역되면 예언과 똑같은 말씀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결코 열등한 은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려면 “방언과 예언은 같은 은사이므로 동시에 존중해야 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눈에 보이는 신기한 현상에 탐닉했고, 그로 인해 교회를 세워야 할 은사가 도리어 교회의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즉!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계시’라는 것이 ‘교회 안에서’ 기능하도록 주어졌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의 일차적인 활동 영역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같은 말씀은사일지라도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걸림이 될 때 사도가 그 말씀의 은사를 제한하여 가급적 하지 않도록 제한하기도 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는 22절 말씀의 통상적인 이해에 반하는 성경적 의미입니다. 문맥 안에서 바르게 읽을 때 22절의 말씀은 ‘방언은 심판의 표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이를 우리가 분명히 잘 깨닫는다면, 1) 불신자에게도 ‘신비한 체험이 믿음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될 것이고, 2)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있어서도 무언가 신기한 체험적 능력이 신자의 믿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22절에 대한 적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14장 전체에서 ‘덕을 세운다’ 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통해서 계시은사가 ‘교회를 활동의 장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를 바로 세우고,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것을 오늘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확신합니다. 말씀은사들이 개인의 신비체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용되지 않고 교회를 위해 바르게 사용될 때 비로소 이 가르침이 제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의 체계를 세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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