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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5-10 (일)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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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대하는 자세(제9계명)
이웃을 대하는 자세(제9계명)
2020년 5월 10일 제43주일 교리문답설교
성경봉독 : 시15:1-5; 요8:31-47
설교본문 : HC 43주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을 요약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이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5계명), ‘이웃의 생명과 명예를 보호하며’(6계명), ‘몸과 영혼에 있어 순결해야 하며’(7계명), ‘땅의 부 때문에 이웃을 해하지 말아야 합니다’(8계명)라는 점들을 배웠습니다.
오늘 계명인 아홉 번째 계명은 특별히 “이웃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9계명은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입니다. 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을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게 포커스를 두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 말씀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나를 갈고 닦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타인, 즉 ‘이웃에게’ 포커스를 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웃에게 포커스를 두면 “타인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을 통해서 타인을 속이고 이익을 빼앗으며 권위를 실추시키기 때문에 이웃의 권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9계명은 이웃에 대한 다른 계명과 달리 ‘네 이웃에게’ 라는 말이 앞에 덧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우리가 크게 유의해야 할 이웃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이웃을 진실하게 대하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거짓이 만연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TV를 틀기만 하면 나오는 광고들은, 우리가 놓치고 있어서 그렇지 대부분이 과장과 거짓의 집합체입니다. 우리는 사고파는 모든 행위들에서 거짓을 경험합니다. 매일 만나는 직장 상사, 동료, 이웃, 내 아이들의 선생님, 학부모, 관공서의 직원과 생필품 가게의 아주머니에게서, 아침에 흘러나오는 뉴스 멘트에서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에게까지 위선된 태도들을 만납니다.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정치가들은 대부분 거짓말에 아주 능한 사람들입니다. ‘공약’이란 전 국민이 다 듣는 약속인데도, 이것을 몇 퍼센트 지켰냐를 따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말해 놓고 지키지 않는 것이 통념이 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거짓은 사람들의 일상이요, 우리의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본 모습 외에 가면을 하나씩 더 갖고 다닙니다. 진실한 얼굴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그 가면의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여줍니다.

세상에 대한 이런 우리의 이해는 너무 비관적이라 서글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모든 것이 죄로 파생된 것임을 성경을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 상호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 상사와 말단 사이에 억지로 짓는 미소나, 정치인들이 가기도 싫은 시장을 들러 악수를 하는 일들이 존재하겠습니까? 아마도 죄가 없는 관계가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쓰고 있는 위선과 거짓의 가면이 벗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줌마들이 수다를 떨기 위해 모여도 거기에 은근한 남편 자랑, 자식 자랑을 위한 과장과 거짓이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입니다. 가장 친근한 관계에서도 암묵적인 거짓이 배어 있습니다. 가족들 간에도 거짓이 대화와 생활 속에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죄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만, 이웃을 진실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거짓’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고 하셨습니다. 여기 ‘처음부터’라고 할 때의 ‘아르케’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할 때의 그 ‘태초에’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역어입니다. 즉 마귀는 우주의 시작부터 거짓말한 자다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거짓의 근원지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아비’라는 것은 단순히 혈연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근원이고 시작인데,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말이 다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타인을 대할 때 진실하지 못한 것의 근원은 어디입니까? 왜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왜 우리는 사람을 속이고, 왜 진실한 마음을 품지 못합니까? 죄 때문이며 우리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는, 신자 역시 이 거짓의 세계 속에 살고 있어서 나 역시 진실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현실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실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현실을 이길 리 없습니다. 자신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거기에서 나올 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실상 거짓의 무덤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선한 사람들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 슬쩍 거짓을 말하는 것이 익숙한 세계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도 역시 그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습니다.
- 신자인 상인도 세상 사람들처럼 은근슬쩍 “손해 보고 파는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거짓말의 힘에 기대어 매출을 상승시켜보려는 시도 속에 살고 있습니다.
- 신자인 직장인도 세상 사람들처럼 은근슬쩍 초과근무수당을 타기 위해 서류를 조작하기도 하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칭찬을 받거나 보수를 받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 신자인 교사도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별로 받지 않고 교직 세계 안에 있는 불의와 쉽게 타협합니다.
-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가 거짓을 쉽게 말합니다.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하여 거짓으로 기도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합니다. 성도들끼리 참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사람을 대하기도 합니다.
신자는 자신이 이러한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자기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식이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확고하고도 분명한 태도로 인도해야 합니다.

둘째가 그 처방전입니다. 신자는 진실해야 합니다. 신자는 분명한 신자의 속성인 ‘진실’을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신자는 진실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완전히 그렇게 하면서 살지는 못하겠지만, 최선을 다하여 진실한 모습을 보이고, 거짓을 말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신자는 신자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을 통해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힘과 능으로는 죄에 죄를 더할 뿐이기 때문에 우리를 죄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분명한 속성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신자의 속성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고전13:6)

먼저 고린도전서 13장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은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이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신자의 본질입니다. 즉 신자는 불의를 보면 당연하게! 마음이 상하고 진리를 보면 반가와야 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신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 속마음에 주시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만약 내가 불의에 둔감하거나 진리에 대해서도 별로 반갑지 않다면 도르트 신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지금의 나는 심각한 죄로 인하여 성령께서 근심하고 계시고 양심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참된 신자는 불의를 언짢아합니다. 참된 신자는 정의를 기뻐합니다. 신자가 이 거짓의 세계 속에서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이 진리를 기뻐하고 불의를 싫어하는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은 두 가지 사실이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과 ‘진리를 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자인 자는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된 자는 동시에 그에게 진리를 알게 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거짓의 세계 속에 살다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그에게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이 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케 된다’ 할 때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탈출, 마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마귀는 거짓으로 사람을 호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진리로 인하여 거짓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거짓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신자의 본질은 진리를 알고 그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록은 음녀와 싸우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을 계시록은 ‘진실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야말로, 진실이야말로 신자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함께 읽었던 시편 15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15편은 9계명에 대한 교과서 같은 시편입니다. 시편은 묻습니다. “누가 주의 장막에 유할 수 있습니까?”, “누가 주의 성산에 거할 수 있습니까?” 시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자다”(2-3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에 함께 거할 수 있는 자는 정직과 진실을 가진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시편의 결론은 “이런 신자들이야말로 영영히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5절)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 :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실과 정직과 공의는 신자의 삶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왜 신자가 사람들에게 신의를 얻지 못합니까? 왜 신자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합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라는 평판을 ‘당연히’ 얻어야 합니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는 고대의 기독교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근실한 도덕성은 부패가 만연한 당시의 풍조와 크게 대조되었다. 그 결과 경박하고 음탕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멀리했으나 사려 깊고 고상한 사람들은 기독교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이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합니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부패한 도덕보다 더 부패했습니다. 그 결과 샤프의 글에서의 초대교회 성도들과는 정반대로 오늘날은, 특별히 한국사회에서는 경박하고 음탕한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를 좋아하고 사려 깊고 고상한 사람들은 천주교나 불교 승려들에게로 갑니다. 교회가 법을 어기고, 전도하기 위해서라면 불법을 서슴지 않고, 교회의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거짓과 쉽게 손을 잡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한 일입니까!
신자인 우리들이 먼저 회개하고 진실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모의나 술수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고 참되고 진실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특별히 말과 행동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를 보면 ‘신자라면’ 믿을 수 있다는 풍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근대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불신자들이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신자들은 믿을 수 있다는 전반적인 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진실한 신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먼저 나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참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합시다.

1. 첫째, 공적 증언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것은 포괄적으로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십계명이 말씀된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에서 이 말씀의 정확한 문자적 의미는 ‘공적인 것’입니다. 성경이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하지 않고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이 ‘증언’의 의미를 반드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증언’(에드)이란 어떤 일에 대해서 공적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이 계명을 실천하려 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점은 “공적인 선언에 있어서 거짓을 행치 않는 것”입니다.
1) 물론 이것은 법정에서의 증언을 포함합니다. 신자는 공식적으로 말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2) 그러나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언하는 모든 말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러 사람이 있을 때 그 중 어떤 사실이나 사람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진실하고 똑바르게 말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물론 진실해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신자는 ‘공적인’ 말에서, 여러 사람이 있을 때 하는 말이 신의가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2. 둘째, 그러나 동시에 이 계명의 본질을 생각하고 이웃을 보호해야 합니다
교리문답에 보면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성급히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 첫 번째 것을 ‘공적 증언’이라고 하면 여기에 필시 반드시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위험요소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면서 ‘이웃 사랑’이라는 애초의 본질을 잊어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쉽게 타인을 정죄해 버리기 쉬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정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겉치레로는 지키지만 속에 있는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공의의 측면을 형식적으로 지키지만 그 안에 사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면 인류는 모조리 아담 때에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의 요지는 ‘이웃을 위한 것’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걸려 있습니다. 이웃을 함부로 모함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면서 “나는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은 이 계명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리문답은 이런 점을 엄히 경계합니다.
-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성급히 정죄하지 말라
- 다른 사람이 성급히 정죄하는 데에도 참여하지 말라
자신을 정의롭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행하신 지극하신 사랑의 뜨거운 심장은 본받지 않고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정죄하신 예수님의 혀만 본받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셋째, 명예와 평판
그래서 교리문답은 이것을 포괄적으로 제일 끝에서 “명예와 평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웃에게 진실하게 대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마음 자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경건이기도 하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할 때, “내가 거짓을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타인이 더 유익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교리문답은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높여야 한다”고 요약하였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온 세계가, 우리 주변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진실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짓의 시대에 우리는 참으로 진실해 지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이 형식적이고, 거짓이고, 위선적인 말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고, 사람을 세워주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득한 말들이 되도록 합시다.
야고보서는 혀를 “능히 길들일 자가 없는, 쉬지 아니하는 악,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약3:8)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입을 두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한 입은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입이요, 다른 한 입은 “사람을 저주하는 입”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독한 말로 분리와 정죄가 아니라, 유순하고 양순하여 거짓없는 의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가 되어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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