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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3-22 (일)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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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특별한 방식(제 2계명)
예배의 특별한 방식(제 2계명)
2020년 3월 22일 제35주일 설교
성경읽기: 신30:11-20; 겔18:1-20
설교본문: 제 35주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 “새긴 우상”이란 말씀은 분명히 예배의 대상인 어떤 신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제 이 계명은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추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제 2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제 1계명과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로마교도들과 루터교도들은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봅니다. 그리고 열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그들은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눕니다. 로마교는 두 번째 계명은 기본적으로 첫 번째 계명과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흔히 다른 신들, 우상들은 새겨진 형상들의 형식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상들은 흔히 형상들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 이계명은 일계명과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 즉 야웨,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관해 말합니다. 제 이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야웨를 섬겨야 하는가,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야웨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제 이계명을 다룸에 있어서 야웨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 예배하는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이것을 이차적인 문제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사람들이 야웨를 섬기는 다른 방식을 논해야 합니까? 일반적인 경향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유사하게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예배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가 예배하는 장소, 교회에서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계명에는 엄격한 처벌이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나 야웨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또한 엄청난 약속도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야웨를 섬기는 방식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섬기는 방식에 따라 복과 저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하시고, 특별한 방식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에게 예배의 방식을 제시하셨다”입니다. 이 주제로 다음 두 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이교적 예배 방식
2. 언약적 예배 방식

1. 이교적 예배 방식입니다.

 제 이 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교적 예배 방식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져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교도들이 새겨진 형상들, 신을 형상으로 만든 것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계명과 연관된 우리의 첫 번째 질문들 중 하나는 왜 이교인들이 형상을 사용하는가? 그들은 이 형상들이 벙어리이고 귀머거리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들은 나무나 돌이나 금속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교도들도 또한 이 형상들이 생명이 없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형상들 없이 어떤 예배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민족들의 모든 예배는 이 형상들의 사용을 통하여 행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새겨진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형상은 그들이 경배하는 신을 나타내는 것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보이지 않는 신들이 이런 형상을 통하여 보이게 되고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다음에 따라오는 단계는 처음에 신을 나타낸 것이 신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형상은 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영예와 경배를 받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형상 앞에 절하면, 그 사람은 그 형상이 나타내는 신 앞에 절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이 형상은 많은 능력들을 받게 됩니다. 이 형상은 일종의 변압기처럼 능력을 더 나타내기도 하고 덜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적 능력, 신들의 능력은 그 형상 안에 포함되고 그 형상을 통하여 다른 데로 돌려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신적 능력에 접촉하여 그 형상을 다스리는 일종의 지배를 실행합니다. 형상은 신들과 예배자들 사이의 이른바 교제를 규제합니다. 형상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예배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출발점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교적인 사고방식에서, 형상 없이 종교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능력있는 형상들을 연상하는 것이 매우 위험스럽다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은 정교한 의식들과 축제들을 만들어서 그런 것들을 통하여 신을 달래고 호의적이고 자비롭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교도들이 만든 의식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이 의식들에는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의식 그 자체, 행위 그 자체가 신을 달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이교도 예배 방식의 형식주의입니다. 그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부차적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믿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정확성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책에 묘사된 합당한 행동을 하고, 그것은 충분합니다. 의식은 그 행동하는 것을 보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교도의 예배의식은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들과 다릅니다. 믿음 없이, 이스라엘의 의식들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희생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수소와 숫양의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시50편). 나는 참된 감사와 참 믿음을 원한다. 나는 너의 마음을 원하고 외적인 형식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성례와 같이 이스라엘의 의식들은 믿음을 요구하고 진정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교적인 예배 방식을 많은 형상들 중에 하나를 선정하여 자기 자신의 공로를 통하여 신을 달래는데 강조점을 둔 정교한 의식주의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의 예배는 자기-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상 배후에 죄악된 인간의 상상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선적인 상상이 없이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을 만들기 전에 먼저 지성적인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신들은 인간의 범주 안에서 묘사되거나 혹은 동물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힘과 능력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숫 송아지를 만듭니다. 신속함과 빠름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자와 표범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신들을 지성적으로 그려본 것을 구체적인 형태와 모양으로 만듭니다. 이런 형상들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또한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들을 형상으로 그릴 때, 그들은 그 신들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데 자기 신들을 휴대하고 다닙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승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신들을 데리고 갑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을 때, 이런 이교도들과 동일한 죄에 빠진 것이 아닙니까? 그때 블레셋은 매우 두려워하여, “지금 이스라엘의 신이 그들 진영 가운데 있다, 우리가 분명히 질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교도적인 방식으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간 것은 귀막힌 묘수처럼 보입니다.

 이 사건은 이교적인 예배 방식이 어떻게 규제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형상을 통하여 드리는 예배는 형상을 섬기는 예배가 됩니다. 정교한 의식들은 구원과 은혜를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상상들은 전체 환경을 결정합니다. 참으로 스스로 참된 하나님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작품을 만들거나 어두운 지성으로 생산품을 만들기 전에 먼저 자기 상상의 허구를 쫓아갑니다.

 따라서 여러분!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이런 거짓된 예배에 대해 꾸짖고 거룩한 조롱으로 비웃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신들이 자신을 지배할 때, 자신이 자기 신들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무기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악한 의식주의의 순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신들이 정말로 달래질 수 있는지 없는지 결코 확신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미신 가운데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거듭 거듭 이 제 2계명을 범하고 이교적인 방식으로 야웨를 예배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이미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천천히 죄에 빠져 들어가서 결국은 제 1계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매우 강력하게 교회 안에서 형상의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마리아를 시작으로 하여 기독교 소위 성인들의 형상들이 소개되었고 기독교적인 예배 방식과 이교적인 예배 방식이 결합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기독교 형상들을 예배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그런 형상들에게 입 맞추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 문제로 인해 무서운 투쟁이 야기되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형상을 사용함으로 인해 제2계명이 십계명의 본문에서 빠진 십계명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은 이런 경향에 반대하는 것으로 일어났습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교회들을 책망하였고, 많은 교회들로부터 형상들을 제거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와 로마교회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로마교는 그 자체로 정책을 약간 바꾸었습니다. 즉 형상이 숭배되어서는 안되고 다만 소위 “평신도들을 책”로 사용될 수 있다고 교정했습니다. 형상들은 눈에 보이는 교육 도구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유럽 대성당에 걸려있는 정교한 벽화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지식을 제공하는데 기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상황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런 방식은 주님께서 결정하신 방식이 아닙니다. 그림이나 다른 형상들이 결코 설교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 이 계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실합니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마지막 문제는 우리 교회 건물 안에 형상을 두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형상에서 현대 형상으로 작은 이동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자기 방식대로의 예배와 같은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 예배에서 설교의 중심적인 위치와 기능에 대한 많은 도전들이 있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교회 회원들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예배 방식을 실험하여 이미 있었던 것 이상으로 더 타락하였습니다. 옛 중세 교회와 같은 형상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의식주의가 소위 개혁교회들이라고 하는 교회들 안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또한 우리의 전통과 형식과 의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식들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마치 어떤 의식이나 형식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되지 않도록 형식주의나 진행되는 행위만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성적 형상을 가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쉽게 우리는 이런 그물에 걸려듭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이런 방식도 있고 저런 방식도 있다, 하나님은 이것도 하시고 저것도 하신다, 실제로 그런 일은 꽤 다르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분이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맘대로 살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현대 이교도의 본질은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는 전혀 하나님에 대해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현대 이교도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유사하고, 자신들이 신적인 받아들임을 즐기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무기력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신, 모든 종류의 죄를 허용하고 사랑만 알고 질투는 모르는 신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오늘날 소위 교회라고 이름하는 많은 교회들에 의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이미지입니다. 그들은 또한 다른 극단으로 가서 온정이 없고 불태우는 타는 불, 자비가 없는 진노의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 형상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렇게 뒤틀려진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닫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압도합니다. 언약적 예배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2. 언약적 예배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형상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의 예배를 싫어하십니까?
 먼저 우리는 야웨,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주권적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붙잡아 놓을 수 없고 조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은 형상 안에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 때에 이 사실을 바르게 인식했습니다. “야웨여, 당신은 너무나 위대하셔서 이 성전이 당신을 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나무나 돌이 어찌 하나님을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유롭고 주권적인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정당하거나 지배당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가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사로잡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사로잡은 블레셋을 압박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야웨께서는 사람들이 만든 형상 안에 포함되거나 조정당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주권적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야웨는 높이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땅위 높은 보좌에 좌정해 계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을 다스리십니다. 이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일시적인 형상에 거하도록 강요받으시거나 우리의 지성적 형상에 맞추시기 위해서 우리의 일시적인 환경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에 더하여 하나님은 비할 데가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추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묻기를, “네가 나와 누구를 비길 수 있는 자가 있느냐?”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특별하십니다.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형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성적 묘사는 부족하고 한 면에 치우치고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주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물론 야웨께서 친히 우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종종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눈, 귀, 손 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일지라도 특별한 형태를 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물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비할 데 없으시고 유일하시고 모든 창조물 위에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직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 안에서 당신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든 형상 안으로 끌어내리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의 친밀함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우리 주일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안에서 명령하신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귀머거리 형상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말씀의 살아있는 설교로 당신의 백성들이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음을 잘 압니다.

 여러분! 이 유일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위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신30장으로부터 무엇을 읽었습니까? 11-14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정말로, 이것은 문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과 같은지를 찾기 위해서 하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계시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명기의 본문을 로마서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10장 6-8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우리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안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 완전한 묘사를 해 주셨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적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설교를 중심으로 드려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게 가르치기 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야웨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친밀하고 인격적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당신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을 심어 주시어 우리가 진실로 우리 입술로 당신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신실하게 설교되는 곳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찬양과 예배를 드립니다. 그곳에서 모든 풍자와 묘사는 금지되고 하나님에 관한 모든 거짓된 사상들은 극복되고 참된 종교가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증거에 의해서, 말씀이 고의적으로 닫쳐지고 더 이상 신실하게 설교되지 않는 곳마다, 그곳에서는 의식주의, 형식주의와 우상숭배가 다시 뚜렷하게 나타나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묘사를 하고 지성적인 모방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이 계명 속에 포함된 처벌과 약속의 부분에 해당됩니다. 내가 어떻게 야웨가 정말로 내 자녀와 자자손손에게 엄청난 결과를 미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말씀을 닫아버리거나 내가 속한 교회가 말씀을 닫아버린다면, 그것은 나의 자녀들에게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시대에, 나의 개인 생활에서 허용한 그 타락이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도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그 계속되는 타락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우리는 에스겔의 예언을 함께 봉독했습니다. 에스겔 시대에 백성들은 잠언을 인용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2절입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 2계명에 맞서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왜 자녀들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규칙은 죄를 범한 영혼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들, 자기 자녀들을 정말로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양육한 부모들도 또한 자기 자녀들 중 일부가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죄는 그 자녀 자신의 책임입니다. 부모들이 불순종하고 불경건한데 그 자녀들이 온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로 주님의 주권적이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은혜는 결코 유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규칙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의 양육은 매우 중요하고 종종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만일 부모들이 방종하거나 관용적이라면, 자녀들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만일 부모들이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불평이 많다면, 자녀들도 그렇게 됩니다. 부모들이 부지런하고, 열심히 자녀들을 가르친다면, 자녀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면제받으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에스겔의 규칙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위치를 알지 못하거나 자기 시대에 타락을 허용함으로 모든 세대가 잃어버린바 됩니다. 타락은 누룩처럼 모든 것에 스며들어 교회를 끝까지 철저하게 파괴시킵니다. 삼사대만에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한 이교도로 만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 계명에는 복이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확고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언약 안에서 보존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말씀을 두고 일하고 살고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 속에는 약속이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언약적 방식의 예배는 자자손손 큰 복과 평강을 줍니다!

 만일 모든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을 섬긴다면, 그때 이 세대는 계속해서 주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 제2계명은 분명히 제 1계명보다 덜 중요한 계명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근거하여, 육신이 되신 그 말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참된 언약적 방식으로 예배하는 자들만 지속적인 평강과 영원한 미래를 보장받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히 영원히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의 복을 누리면서 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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