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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1-01-31 (일)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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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
2021년 1월 30일 주일 오후 설교
성경봉독 : 롬 9:10-24절
설교본문 : 벨직신앙고백서 제 16항




 원죄

 15조에서 모든 사람들이 원죄(특정한 죄의 행위가 아니라 죄의 상태이다)를 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죄에 빠짐으로 사람은 자신의 높은 위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결과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은 타락을 통하여 하나님과 결속을 깨뜨리고 사단과 결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죄에 빠졌습니까? 창조주께서 사람을 결핍을 가진 연약한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입니까? 사람이 죄에 빠지도록 강요를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사람은 완전한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창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죄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그 아담의 범죄에 참여하였기에 사망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 외에 누구도 원망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에 빠진 것은 사람 그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못이 하나님의 책임인양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죄에 빠진 결과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사단의 유혹대로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자신의 선한 자질들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마다 말하는 것마다 더러운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고 말합니다. 곧 인간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인해서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인가를 행할 능력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이 죽음의 상태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꼭 구원을 해야 되겠다” 하실만한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은 찾으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반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사단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돌트 신경은 타락 후에 사람의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전적 타락”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부패와 완전한 무능을 말합니다.

 심지어 이 죽음에 던져진 사람은 도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조차도 없습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편에서 하나님께 나가거나 올라갈 자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지경에 놓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저들은 피하고 숨고 원망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저들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친히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사단의 편에서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편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구원하십니까? 죄에 빠진 후에, 전 인류는 사단 편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사단의 편에서 구원하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들에 관하여,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했습니다(마1:21).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사람들 혹은 선한 사람들,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들, 혹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란 말씀을 읽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구원받을 것이라는 교리입니다(요17: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선택
 선택한다는 것은 곧 택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께서 죄에 빠져서 사단에게 연합한 전체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원할 일부 사람들을 택하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구원으로의 선택 개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입니다.

 엡 1:4,5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심에 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또한 롬 8:28-30에서, 우리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아닌 일부 사람들만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 13:48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었다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모두가 다 믿은 것이 아니라 즉 이전에 영생을 받기로 작정되었던 사람들의 수만큼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돌트 신경 1장 7조는 다음과 같이 선택을 정의합니다.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불변하신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정된 수의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택하신 것입니다.”(제한속죄)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이 제한된 수의 사람들을 데려올 목적으로 사단의 편에서 일부 사람들을 다시 당신 자신의 편으로 돌아오도록 결정하신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유기

 선택이 사단의 편에서 일부 사람들을 선정하고 취하여 당신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인 반면에, 유기는 하나님께서 다른 일부 사람들을 버려 두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빠져든 비참함 가운데 남아있게 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것이 아니고 다만 일부 사람들은 선택받지 않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서 제외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자유롭고, 공의롭고, 순결하시고, 불변하신 선한 기쁨 가운데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빠져든 그 공통의 비참함 가운데 그냥 버려두시고, 구원 얻는 믿음과 회심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돌트신경, 1장, 15조). 선택은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능동적인 행동인 반면에, 유기는 백성들을 버려두시는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비록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선택받은 결과일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이 유기되었기 때문에 멸망당한다고 하거나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옥으로 가도록 정해졌다고 논의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사단의 편에 연합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옥으로부터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고 이것은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공의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16조는 “자비와 공의”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정하신 선택은 자비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죄에 빠졌다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가장 엄청난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일부 사람들을 사단과 함께 버려두신 것은 공의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 사단과 연합했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든 그곳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은 공의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봐 주시지 않으시고 사단과 함께 버려두신다고 해도, 우리는 다만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회복시키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기에 대한 성경적 증거

 계 13장 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생명책은 오직 선택된 자들, 생명으로 정해진 자들의 이름만 포함합니다. 일부 이름들이 생명책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만 이 사람들이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버림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 하나님보다도 사단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벧전 2:8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자들에 대해서 읽습니다. 이 범죄와 연관하여, 베드로는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거부하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고,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왜 부딪치는가? 베드로는 말하기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복음에 부딪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반응하도록 정하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기입니다.

 선택의 교리는 공정한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의문은 과연 선택의 교리는 공정한가 하는 것입니다. 롬 9장에서 우리는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으나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을 읽습니다(13절).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불공정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고 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편에서의 이 선택이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14절).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합니다(출 33장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15절). 구원에 대한 것은 구원받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구원받을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16절).

 이 사실을 바울은 바로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에서 지적된다고 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습니다(17절). 바로가 마음을 강퍅케 하고 완고하게 되어 하나님의 열 재앙이 애굽을 황폐화시킬 때까지도 버티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더 찬양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경의 교훈은 이것인데 곧 주권적으로“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입니다(18절).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을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롬 9장 14절에서 선택과 유기가 공정한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일부 사람들을 버리시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이냐?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습니까? 20절과 21절에서는 우리가 질문하고 도전하는 우리의 방식과 의도에 대해 반문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과 사람이 동등하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면(그러나 여전히 죄악될 뿐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도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연관하여 나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불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 따라서 내 편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의 손으로 내 입을 가리고 ‘나는 멸망 받아 마땅한 자일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즉 이 말은 내가 하나님께 “왜 일부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일부 사람들은 구원하시지 않습니까?”라고 도전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으로 욥에게 나타나신 후에 욥의 태도는 합당하였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3).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다른 일부 사람들을 버리시는 근거는 사람 편의 행위에 달려있을 수 없습니다. 롬 9장 11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사랑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문맥에서 이에 대해 진술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근거는 단순히 당신의 선한 기쁨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5,6). 일부 사람들은 선택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선택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의 이웃을 선택하지 않으셨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한없는 겸손으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나는 내가 그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깊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죄인인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런 사역 때문에 마땅히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은 우리가 영원히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

 알미니안 신학은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병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일입니다.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죄로 병들었을 뿐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고, 성경이 선택에 관해 가르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병들었을 뿐이라면(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구원받을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알미니우스는 선택은 조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기로 결정하심은 내가 믿기로 결정할지 아닐지에 따라 조건적이다고 말했습니다. 알미니우스는 가르치기를, “하나님은 내가 믿게 될 것을 미리 아심으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예지예정). 즉 내가 실질적으로 믿게 될 것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정해진 숫자의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각 개인들은 믿지 않도록 혹은 믿도록 선택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누구든지 그리고 모든 사람을, 즉 믿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의도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보편 속죄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로(그래서 구원받도록) 결정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기로 결정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제공하신 것을 붙들라고 죄인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한 그 결정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혜는 저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을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신자는 수년 후에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복음을 거절하기로 결정 할 수 있고, 진리에서 떠나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사람에게 구원을 확신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제공하신 것을 사람이 붙잡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단축시켜서 새 예루살렘의 인구가 궁극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구원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개혁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다만 죄악된 피조물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택교리가 주는 위로

 선택 교리에서 우리가 받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디모데와 바울은 둘 다 복음 때문에 고난 당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딤후 1장 4-10절을 읽어보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디모데를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여기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그 위로를 기억나게 한 것은 선택에 대한 것으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역 때문에 사단과 지옥의 분노와 맹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로 일부 사람들을 정하시고 부르심으로 시작하신 그 사역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에게서 그 누구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요10:27,28절).

 또한 롬 8:28-39절은 선택의 지식으로 신자들이 경험하는 위로를 지적합니다. 28-30절은 선택의 사실과 연관됩니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위로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은 위로인데, 곧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31절, 33절)고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셨다면, 누가 나를 비난하고 고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고, 당신 앞에서 무죄하다고 선언하셨다면,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이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울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들의 확신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망이나 생명이나 능력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만일 구원이 나에게 달려 있다면, 내가 삶의 폭풍 속에 있을 때, 나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 확실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신실하심으로 내가 항상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는 이런 위로를 나에게 줍니다. 바울이 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이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 후에, 계속해서 과거시제로 영화에 대해 기록한 것은 중요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날에 돌아오실 때까지 영화롭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바울은 현재의 실재로서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즉 바울은 과거 시제(단순과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삶 속에서 언제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내가 느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택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일부 사람들의 선택의 확실성

 그렇다면 나는 내가 택자들 중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은 그들이 사단과 함께 있을 때 전적으로 죄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택자들이 죽었을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셨습니다(24항).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엡1:4). 택자들은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되었습니다. 이 새롭게 됨은 택자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에 의해서, 성령의 열매가 있는 것에 의해서 증거됩니다. 주님께서 사단 편에 여전히 있고 지옥에 던져질 운명인 사람들 안에서 이 믿음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택자들 가운데서 이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 7:16-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택자들 가운데 있는지를 알려면, 나는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삶 속에서 중생의 증거와 믿음의 열매를 봅니까? 나는 나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의 증거를 보는가? 나는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고 죄를 슬퍼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합니까? 만일 내가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와 선택받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던져질 자에게 선택받은 증거를 일으키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2주일 86문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 답은 이것입니다. “ 우리 각 사람이 그 열매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돌트 신경에서 1장 12조는 이 사실을 더 강력하게 진술합니다.

 “택자들은 비록 시기가 다양하고 그 정도가 다르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선택을 받았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져 있고 깊은 것들을 호기심으로 엿봄으로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고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선택의 확실한 열매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 의에 주리고 목마름 같은 것을 발견함으로써 이 확신을 얻습니다.” “한편 성경은 신자들이 이생에서 여러 가지 육신의 의심과 투쟁하며 심각한 시험 아래 있을 때에는 이러한 믿음의 확신과 견인의 확실성을 늘 충만히 느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자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제공해 주시어 성령에 의해서 다시 신자들에게 견인의 확실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5장 11조).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또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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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사람이 진실한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 파루시아 2021-01-17 52
178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믿음 파루시아 2021-01-10 50
177 천지만물의 창조 특별히 천사들의 창조 파루시아 2021-01-03 47
176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파루시아 2020-12-20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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