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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9-20 (일)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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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회중이 예수님의 생각을 좇아 교제하는 곳이다.
교회는 회중이 예수님의 생각을 좇아 교제하는 곳이다.
2020년 9월 20일 주일 오후 설교
성경봉독 : 요10:1-21, 겔34:2-16
설교본문 : 요10:9,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강조하며 배워 온 것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만일 교회가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라면 우리가 좋은 교회를 만들기는 그다지 어렵거나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돈을 넉넉히 모아서 아름답고 멋있고 분위기 있게 건물을 꾸미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들이기에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은 몇몇 사람들만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조직을 잘 갖추어서 그 조직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 안에는 조직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 명령하는 체계가 필요하게 되고 사람들 간에 위아래 계급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교회는 그 본질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즉 잘못하면 사회의 조직체와 비슷한 단체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제일 중요한 요소는 사람들 간의 사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서로 조금씩은 다른 환경, 다른 문화, 다른 신앙적 배경에서 성장해 왔으며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과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간의 사귐이란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거나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종류의 사귐을 갖느냐에 따라 교회의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교회에서도 계모임이나 친목 단체에서 나누는 식의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나면 악수하고 인사하고 “다음에 또 봅시다”, “오랜만이예요, 교회에서 뵈니 너무 반갑고 좋습니다.” 등등 인사말을 나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사만 매주일 무성하다면 그 교회는 진정한 사귐이 있는 좋은 교회라고 하기에는 힘듭니다.(한 주간 학교나, 직장에서 있었던 일, 주중에 있게 될 중요한 일들을 서로 나누고 교제하는 것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매주 이런 일이 반복되고 우리의 대화가 거기에만 한정된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식의 사귐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교회로서 사람들의 사귐이란 서로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어디 사는지도, 식구가 몇인지도 알아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서로의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오픈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로간에 마음이 열려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나누어지는 것 이것이 제가 말하는 ‘생각’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가 서로의 생각을 나눌 만큼 진정한 사귐을 갖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답은 아직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의 우리 모임은 참 좋은 가정 같은 모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결정적인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교회는 우리 교회 또는 내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주인이다’ 또는 ‘ 내가 주인이다’라는 생각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한 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잘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 또는 ‘내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뜻에서입니다. 달리말하자면, 주인 의식이 아니라, 지체의식 내지는 소속 의식에서 그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쓸 때는 반드시 우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생각은 제쳐 둔 채 우리들 교회구성원들만의 생각을 알아 가는 것은 교회로서는 의미가 적은 일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노력한다 해도 우리 서로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안다 해도 그 많은 생각들을 똑같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들이 그 토대로 삼아야 할 하나의 공통된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는 수많은 가지가 있지만 그 모든 가지들이 같은 줄기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생각을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이유, 즉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서로가 지체로서의 사귐을 계속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좋은 교회라는 표시입니다. 이러하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백성인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분의 생각을 알고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제 저는 “교회는 각 사람이 예수님의 생각을 좇아 교제하는 곳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째,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것
 둘째,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첫째,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것

 요9장에서 안식일 날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주신 일로 인해 유대사회에 큰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에 이어 예수님께서 10장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먼저 1-5절의 내용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이처럼 청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7절 상반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일반적으로 집 마당에 양의 우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는 비록 지붕은 없지만 벽은 사방으로 튼튼히 쌓여있습니다. 문은 하나만 만들어서 그 문을 문지기가 지키도록 하여 양을 보호합니다. 그러기에 이 양들을 훔치거나 해치려면 문이 아닌 담을 타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 양들의 목자가 와서 자기가 보살필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서 그들을 데리고 나갑니다. 이때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목자가 양들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장서서 가면서 소리를 내면 됩니다. 그러면 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그것을 듣고 따라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일반적인 그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고 6절은 말합니다. 성도여러분,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쉬워서 듣는 사람 누구나 다 알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6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였는데 이 비유에서 사용된 요소 중에 문, 절도와 강도, 목자, 양들이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7절 이후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 ‘선한 목자’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비유를 다 듣고 알게 된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적어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정도의 표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19-21절에 그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여기서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심각한 의견대립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귀신들려 미쳤다”, “그의 말은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주장이 다수요 일방적 주장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귀신들려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근거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자이기 때문이다’는 주장이 비록 소수이나, 비교적 합리적 의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아듣고서도 그분과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떠하기에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듭니까?

 7절 끝에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자신께서 그 의미를 두 가지 측면에서 명쾌하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는 8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의미입니다. 8절에서는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보다 먼저 온 자들을 가리켜 ‘절도’며 ‘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 자신이 ‘목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이 되어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불러내러 오기 전, 즉 아침이 오기 전에 이미 온 자들은 절도이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나는 양의 목자이다”라고 하시지 않고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뚜렷이 드러나며 절도나 강도와 그 성격이 대조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양들에게 접근하게 되는지는 잘 부각되지 않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문’이라고 표현하심으로써 자신이 목자이심과 동시에 문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뿐인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목자뿐입니다. 반면에 이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는 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계시사적으로 양의 문은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성도에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리요, 도적입니다. 이전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십자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측면의 의미는 9절에서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이라”고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문이 갖는 성격을 드러내십니다. “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그는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다.” 사실 양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며 악한 짐승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며 튼튼하도록 풍성한 꼴을 주는 것은 문이 아니라 목자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치 ‘문'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표현하십니다.

 이는 목자가 그 문을 통해 양들을 각기 이름을 불러 이끌어 내고 앞장서서 그들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해가 저물면 그들을 데리고 다시 그 문을 통해 우리 안에 넣어 평안히 쉬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문을 통해서만 어떤 양이든지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받고 그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문을 통해 양들을 이끄는 목자와 문을 통하지 않고 양들에게 접근하는 도적을 대조시켜서 말씀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사악한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까지 모두를 가리켜 한 마디로 양들을 죽이는 도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내가 양의 문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 즉 예수님에게 속한 그분의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양들은 구원받지 못해서 생명을 잃어버린 채로 계속 죽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할 수 있는 분인가? 입니다.

 예수님은 7-10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에 비유하심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양들을 위한 오로지 하나뿐인 목자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11-18절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제시하심으로써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양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공급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칭하시는데. 특별히 ‘선하시다’는 의미에 대해 두 가지 살펴봅시다. 먼저 11절 하반절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자신이 하실 일이 어떤 일인지를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할 일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문맥에서 보건데 ‘선한목자’의 반대말은 ‘악한목자’나 ‘나쁜목자’가 아니라 목자가 아닌 자들, 즉 ‘삯꾼’입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들의 주인도 아닙니다. 따라서 삯꾼은 궁극적으로 양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일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판단되거나 생명이 위태로우면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 내놓기는커녕 그들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대신에 삯꾼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양들을 버립니다. 둘 다 버리기는 버리는데 과연 무엇을 버리는 것인가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11-13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14-16절에서는 예수님이 선한목자이시므로 갖게 되는 또 한 가지 측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은 11절과 마찬가지로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선한 목자되심은 예수님과 그분의 양들 간에 서로 아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이신 그분을 압니다. 그러면 이러한 앎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겉만 잘 아는 것인가? 아니면 속까지도 아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15절에서 얻게 됩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이런 앎은 상대방에 대해 온갖 정보를 다 수집하여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과 같은 앎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외적인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수준의 앎이 아닙니다. 마음깊이 서로 닿아있는 그런 앎을 말합니다. 어쩌다가 이심전심으로 마음과 뜻이 통하는 정도의 앎이 아니라 목자로서는 목숨을 내건 앎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양들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적어도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갈 만큼 그분을 아는 앎이어야 합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새로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셔야 할 다른 양들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예수님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으므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즉 이방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도 장차 동일하신 한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분의 양들이 되어 한 무리를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복음의 개방성은 사실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되어 온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길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자기 자녀들을 기억하시고 구원할 자를 불러모으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또 다른 분노를 심어주게 됩니다. 17-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압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자신의 목숨을 버림은 억지로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시는 그분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께서 목숨을 버리신다고 해서 양들이 다시 목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다시 찾게 되십니다. 그리고 자기 양들의 영원한 선한 목자로서 그들을 영원히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씀하는 내용을 다 들었습니다. 예수만이 선한 목자이십니다. 여러분도 그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미친 소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온건하게 ‘말은 되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못받았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양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하시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실제로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인 우리,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버린다(17절)고 말씀하심같이 그리하셨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께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핵심적인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이심을 믿는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확인만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꼴과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음성은 어디서 듣습니까? 어떤 예언 기도한다는 분에게입니까? 아니면 기도원에 올라가야만 듣는 것입니까?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양의 도리입니다.

 교회의 목회자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가 목자는 아닙니다. 더구나 그가 ‘선한’목자일 수도 없습니다. 설령 그가 교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빨리 정확히 듣고 교인들의 맨 앞에서 앞장서서 따라가는 양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목회자는 다른 어린 양들을 돌보고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좀 더 성숙한 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들은 목회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목회자가 박식하고 친절하고 믿을 만하다고 해도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연약해서 쓰러질 수 있는 하나의 양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두는 양떼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며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먹여 주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가르침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만이 우리 모두의 유일한 참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이심을 믿으십니까? 만일 이 고백이 참된 고백이라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깊이 알고 교제하는 일에 우리의 일생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화원언약교회의 지체들인 여러분 각자가 예수님의 생각을 좇아가며 교제하는 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욱 힘쓰며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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