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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8-30 (일)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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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구속사적 의미
방언의 구속사적 의미
2020년 8월 30일 주일 오후
성경봉독 : 사28:1-13; 행2:1-36
본문 : 고전14:20-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방언에 관하여 연속해서 설교를 듣는 가운데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방언이 말씀은사라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사실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언을 이해함에 있어 방언이 말씀은사임을 인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일입니다.

 이제 그 다음 단계로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방언에 관한 가르침은 특별히 고린도전서 본문에서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의 방언의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사도행전 2장이나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방언이 “왜 필요하며,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지” 성경 전체의 조망 아래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피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본문 한 구절 한 구절을 세부적으로 살피는 것만큼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읽을 때 낱장을 떼어 읽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속역사 안에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주제는 “방언의 구속사적 의미”입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지혜ᅟᅥᆹ음과 부족을 채우시고 말씀에 대한 더 선명한 이해를 가지도록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어에 대한 이해

 먼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말’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갖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로서 우리는 보통 “말씀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듣고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쯤은 이런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과 동일시하실 정도로 말씀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은 세상의 그 많은 것들 중에 하필 ‘말’이라는 것으로 나타나셨는가?” 왜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말씀은 이다지도 중요한 것입니까?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은 말씀이란 하나님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이고, 하나님의 존재원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나 특별히 ‘말’은 하나님의 본질을 담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피조세계 속에서 ‘말씀’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일반은총의 피조세계 속에서 ‘말’이 힘을 갖게끔 세계를 지으신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과 ‘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과 동일시한 것을 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일상에서도 사용하는 이 ‘말’이라는 것은 사실상 엄밀히 말하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 중에서도 사실상 ‘말’이란 살아 움직이는 어떤 생물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말’ 혹은 ‘말씀’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입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의사전달이 되는 소리로서의 매개수단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 구절들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동일시하고 계신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최초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한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은 하나님께 직접 칼을 겨누지 않았고, 단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불응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불응한 것을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도발’로 여기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 그 분을 직접’ 업신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시내산언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기타 율법들을 주실 때에 실은 겉모습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말씀을 주시는 장면이 바로 하나님의 즉위식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불러서 왕으로서 그들에게 강림하셔서 왕좌에 앉으시는 장면이 바로 이 때의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왕위 즉위식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율법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즉 율법이 백성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때를 대비하여 주어진 말씀에서도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그들이 왕국의 모양을 갖출 때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현현하시거나 강림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일을 명령하실 때 “율법을 준수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쉐마에서 이 부분을 살피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신명기 6장 말씀에 보면 4,5절과 6절은 같은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4,5절 : “이스라엘아 들으라...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절 :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렇게 두 구절을 놓고 비교해 보면, 여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과 하나님 사랑을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요한일서5장 3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합니다.

 - 모세의 놋뱀도 마찬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불뱀에게 물렸을 때 “놋뱀을 보면 살리라”(민21:8)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놋뱀 그 자체에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놋뱀을 보면 살 수 있는 이유는 “놋뱀을 보면 살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이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약의 입장에서 이 장대에 달린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무엇과 무엇의 동일시가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동일시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말’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닙니다. 자주 ‘말’은 ‘하나님 자신을 직접 나타내는 방편’으로 사용된 대단한 도구였습니다.

교회의 대항세력인 세계왕국에 내린 심판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말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최초의 가장 상징적인 세상왕국을 무너뜨리실 때 ‘말’과 관련된 저주를 내리셨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창11장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립되는 세상왕국에 대한 이야기로 ‘바벨탑’사건을 설명합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립되는 세상왕국의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왕국을 어떤 방식으로 이를 무너뜨리셨습니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말을 혼잡케’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살핀 대로 말이라는 것은 바르게 사용될 때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계시의 방편이 됩니다만, 그것이 잘못 사용될 때, 즉 천사가 변하여 마귀가 되듯이 가장 존귀한 하나님을 계시하는 도구인 말이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을 적대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말’을 통하여 펼치시는 일들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따라서 인간은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하나님을 아는 도구가 되는 영광스러운 말’은 동전의 양면처럼 그것이 악하게 사용될 때는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사람들을 미혹케 하기 위하여 가진 무기가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계13:5)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다음절을 보면 이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6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도 말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도 ‘말’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 왕국 위에 내린, 하나님의 ‘말의 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해지는 것은 극렬한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을 통해 말씀하여 주실 때, 그것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말이 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는 말이 하나님의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사28장에서 - 우리가 읽은 이사야 28장에 바로 이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은 앗수르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비웃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사28:5-6)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앗수르가 구해줄 것이라 믿고 축하주를 들고 있다) 비틀거리면서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28:9)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저게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라고 놀리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은 우리말 성경에는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라고 되어 있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뜻을 가진 말이 아닙니다. 언어유희입니다. “차우 라차우 차우 라차우 카우 라카우 카우 라카우”, “이러쿵 저러쿵 주저리 주저리” 이런 뜻입니다.

이사야 28장 11절 말씀은 이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 말씀하시리라!”

 그들이 계시를 듣고서도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고 하면서 비웃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이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했는데, 저들이 그 ‘알아들을 수 있는 계시’를 무시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시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과 저주의 양면성으로서의 방언

1. 방언은 심판

이 이사야 28장 말씀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즉! 방언은 말씀은사이고, 예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시되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언이 보여주는 일차적인 의미는 ‘심판’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을 이전 비유를 배우면서 다루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배운 바는 비유는 1) 계시를 가리우기 위한 방편이다(마13:11-15). 그리고 비유는 2)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다(마13:34-35)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방언과 똑같지 않습니까? 방언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진전이 있다면, 그나마 비유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으나, 방언은 심판이 더 진전되어 아예 그들이 알아듣는 자체가 불가능한 외국의 언어로 시행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다른 어떤 일이 아닌, ‘방언이 임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새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 새 시대는 심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방언의 도래는 언약 역사 안에서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행해진 몇 가지의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그 중요한 관문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면(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는 사실도 한편으로는 심판으로 주어졌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고, 오시는 그분은 불로 심판하시는 분”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이들에게 다음 시대로의 진전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교회시대입니다.

 즉 교회시대의 시작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옛 이스라엘을 딛고, 그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역사를 통해서 ‘신기한 영적 체험’을 보아서는 안되고 우선적으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새 시대가 오기는 했으나, 그 새 시대는 단순히 잘해서 일어난 진전이 아니라 배도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일어난 새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개인의 영적 체험’으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오순절 사건은 구속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해당합니다.

2. 방언은 심판의 회복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한 가지 더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의 또 다른 측면, 즉 언약적 복에 관한 것입니다. 비유를 배울 때에도 우리는 비유에 동시적 두 측면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약은 항상 두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반하는 이에 대한 경고와 함께, 순종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복, 그것이 언약입니다.

 방언에서는 어떤 점이 복입니까? 두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든 사람이 선지자되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드러나는 첫 번째 방언의 복의 성격은 그 본문에서 요엘서가 인용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이 막 방언으로 말하자, 베드로가 이상해 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요엘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요엘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을 꿈을 꿀 것이다”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예언’, ‘환상’, ‘꿈, 여기서 언급된 이 모든 것들은 “계시의 방편들”입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계시를 알려주시던 방편들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만 특별히 계시의 영을 받아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에스겔에서 ‘새언약’에 대해 약속했듯이, 새시대가 도래하면 ‘모든 사람이’ 선지자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사람이 선지자 되었다는 것,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는 것이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때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방언, 즉 하나님의 계시를 다 말했습니다.

 즉! 방언이 임한 것은 새언약의 시대, 모든 사람이 제사장되고, 모든 사람이 선지자되고, 모든 사람이 왕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방언은 한편으로는 심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께서 오셔서 여신 이 새 시대가 이전 옛시대와는 다르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율법이 새겨져서 더 이상 다른 어떤 특수한 직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이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언약의 복입니다!

2) 바벨탑의 저주가 풀려졌다

 그 다음 두 번째 언약의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벨탑의 저주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세상왕국이요, 사람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사람의 길을 갈 때 주어졌던 하나님의 심판이 언어를 혼잡케하여 알아들을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는 그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바벨탑의 저주로 말미암아 외국에 사는 사람들, 즉 바대인, 메대인, 엘림인, 메소보다미아, 갑바도기아, 본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살던 사람들은 언어적 한계를 서로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을 통해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방언이 터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 자신들의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행2:11) 듣지 않았습니까? 즉! 오순절의 방언은 ‘세상왕국’인 바벨탑에 내려졌던 저주가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 안에서 회복됨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면 온 세계의 사람들이 각 나라의 말로 말하기 때문에 서로 알아들을 수 없고 통역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언어의 혼잡은 ‘죄의 산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반드시 바벨탑 이전, 그러니까 온 인류가 한 언어를 사용하던 때로 ‘귀정’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방언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바벨탑 저주의 회복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방언은 ‘개인의 영적 체험’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언에 관한 성경 계시의 가르침을 잘 들으셨습니까? 저는 이 방언에 관한 일련의 설교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1) 방언의 성경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2) 왜 방언이 종결되었다고 말해야만 하는지를 확신하여 ‘방언종결에 대한 확신주의자’가 되기를 원하며,
 3) 그래서 오늘날 이 혼란스러운 신비주의적 한국교회의 상황속에서 여러분들이 더 이상 혼잡을 겪지 않고 분명하게 이 악한 신비주의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랍니다.  
넘쳐나는 소위 방언이라 하는 것들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왜 교회에 방언을 주셨는지를 구속사적으로 깨달아, ‘신비한 영적 체험’을 추종하지 않고, ‘우리 주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구속사역’을 방언들 속에서 발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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