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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8-23 (일)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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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가르침
방언에 대한 가르침
2020년 8월 23일 주일오후
성경봉독 : 사28:1-13; 딤후3:1-17
본문 : 고전14:1-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언이라는 주제는 한국교회 안에서는 대단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이고, 은사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는 방언이 거의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홈페이지 등에서 베스트셀러 차트를 보면 방언을 비판하는 책과 방언을 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책들에 동시에 올라와 있는 것을 종종 보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적어도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성도들이 이 방언에 대해 아주 대단한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몇 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 교회 안에서 방언에 관하여 확고한 이해가 정립되기를 기대합니다.  

 첫째는 우리 성도들이 이전에는 방언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었거나, 주변의 영향 등으로 말미암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성경적으로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 성도들이 ‘방언종결에 대한 분명한 확신주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체험하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쉽게 “그건 존재하지 않아”라든가, “당신의 경험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계시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고, 구속역사에 대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방언은 초대교회 당시 외에는 불필요하며, 사도시대 때의 계시적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더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바는, 성경이 말씀하는 방언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면 지금도 여전히 방언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팔머 로벗슨이라는 분은 책에서 방언이 계시라는 점을 밝히고 난 후에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방언을 신약 성경에 나타난 방언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성경 외에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로도 삼을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저는 이런 이해가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의 확신이 되길 기대합니다.

 셋째는 방언현상에 대한 통찰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에 대한 경외가 더 높아지고, 현대의 악한 신비주의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방언은 계시다

 제일 먼저 다루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고 방언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틀이기도 한 것은 ‘방언이 계시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방언이 계시의 한 방편이었다는 것만 분명히 이해하게 되더라도 오늘날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방언은 존재를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방언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이 교회에 ‘말씀은사’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놓칩니다. 이것만 제대로 이해하더라도 오늘날 거의 대다수의 방언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날 아무도 설교를 방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존재한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언을 ‘기도’로 이용하지만 성경에서 방언의 역할은 ‘계시은사’입니다.

 이를 성경 구절들의 해석을 통해 확인하고, 또 그를 통해서 계시에 대한 존중들이 우리 가운데 더욱 드러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13장에서
 첫 본문은 13장 8절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에서 함께 언급된 ‘예언’, ‘방언’, ‘지식’이 모두 ‘말씀은사’입니다. 성경에 은사는 주로 말씀은사와 봉사은사로 대표되고, 그중에서도 말씀은사가 더 강조되었으며, 13장 본문에서는 ‘사랑’의 영원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은사가 폐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은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인 ‘말씀은사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것조차도 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8절의 말씀에 등장하는 세 은사 ‘예언’, ‘방언’, ‘지식’은 모두 말씀은사에 해당하며, 당연히 방언은 ‘말씀은사’입니다. 곧 방언은 계시의 방편입니다(14장 6절에도 같은 방식으로 방언이 그 그룹에 묶여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여기서도 방언은 ‘계시, 지식, 예언’과 같은 부류입니다).

두 번째 본문은 그 다음 구절인 13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8절은 은사를 세 가지를 이야기하지만, 9절에서는 이 세 가지 은사를 모두 받으면서도 이를 ‘예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과 10절 말씀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하다가, 나중에 온전한 것이 올 때 폐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8절의 은사들입니다. 8절에서 ‘이 세 가지들이’ 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과 10절은 이 세 가지 은사를 받을 때 대표로 ‘예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방언’도 ‘지식’도 모두 ‘예언’의 은사와 같은 테두리 안에 묶인다는 뜻입니다. 즉 방언도 지식도 모두 예언처럼 말씀은사입니다.

2. 14장에서 : 예언과 방언의 대조

 방언이 말씀은사라는 점은 14장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14장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점은 말씀이 계속해서 방언을 ‘예언’과 같은 맥락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 먼저 14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1절 말씀은 사실상 14장 전체가 ‘무엇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지’ 서론격이 되는 말씀입니다. 14절은 우리 말 성경에는 번역이 오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되어 있으니까 꼭 예언을 모두 다 해야 되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입니다만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은 우리가 배웠던 여러 가지 은사들 중에서 “예언의 은사를 특별히 더 사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어떤 은사들보다 말씀의 은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절 말씀에서 이렇게 “예언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고 정리를 한 후에 ‘방언과 예언’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2) 방언은사가 예언은사처럼 말씀과 관련된 은사이기 때문에 2절에서 방언을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비밀’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계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2절은 바로 방언이 이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밀의 용례와 관련하여 생각하자면 방언은 비록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행해지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사역입니다.

 3) 단지 예언과 방언에는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비교해서 보시면 그렇습니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라서 알아듣는 자가 없는 비밀이고,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행해지는 비밀이다.”

 이러한 비교는 같은 맥락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둘은 단지 도구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둘 다 계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서의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절 말씀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라는 구절을 보고는 방언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기도 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교통수단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그 말씀의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앞 뒤 문맥을 보시면 이 말의 뜻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신비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덕’이라는 측면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방언보다 예언이 더 뛰어난 은사인 이유가 ‘덕을 세우는 측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달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직접 덕을 세울 수가 있고,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달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직접 덕을 세울 수가 없고 유익을 혼자 누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차이는 결국 계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이 되느냐, 알아들을 수 없게 전달이 되느냐의 차이일 뿐 계시라는 측면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5절 말미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비교할 때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라는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과의 차이는 통역이 필요하냐 아니냐 뿐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습니다. 둘 다 계시은사이고, 방언보다 예언이 더 덕이 된다는 것은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예언은 바로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이후에 나타나 있는 몇 절도, 바로 이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방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방언을 ‘하늘의 언어’, ‘천사의 말’이라는 표현으로 미화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이 방언을 다루고 있는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방언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석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방언을 이해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이 제일 중요한데, 이 장은 온통 ‘방언이 예언에 비해 열등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방언을 옹호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사실이 치명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증언자가 자기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증언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의 주장자들처럼 방언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방언을 가장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의 주제가 ‘방언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내용이 아니라,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는 가르침이겠습니까?

 7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기서 초점은 “방언이 천상의 언어이다”가 아닙니다. 그저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들입니다. 7절에서 방언은 ‘저나 거문고’에 비교되었습니다. 저나 거문고가 제대로 음이 분별되게 연주되지 않는다면 그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7절의 목적입니다. 방언이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일 뿐이라면 아무 쓸데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6절을 겨냥한 것이지요? “내가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8절에서는 ‘나팔소리’에 비유되었습니다. 나팔소리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팔소리가 메시지가 되려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호화 되었을 때뿐입니다. 예를 들어 “세 번 끊어서 불면 적군이 침입한 것이다.” 이건 소리의 ‘신호화’입니다. 나팔 소리가 의미를 지닐 때는 이 때 뿐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언이 통역되지 않고 모르는 말로 큰소리로 선언만 된다면, 그냥 신호가 없는 나팔과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내용들로 볼 때, 고린도전서 14장이 말씀하고 있는 방언이란
1) 예언과 비견될 수 있는 분명한 말씀은사이다
2)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예언보다 못하다.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이 계시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방언이 계시임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헛된 방언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가르침도 우리에게 줍니다.

 첫째, 물론 방언이 계시임을 알 때, 우리는 헛된 방언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방언이 계시임을 알게 될 때 직접적으로 얻는 큰 유익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방언을 용인하는 것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방언을 인정하는 것은 곧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말씀 외의 다른 방편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열어줄 소지가 매우 큽니다.

 은사주의/오순절주의의 진정한 위험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신기한 방식으로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역사하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종국적으로는 “이미 완성해 놓으신 계시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하찮게 만드는 길로 ‘반드시’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계시의 존재도 부인하십시오. 계시는 종결되었습니다. 계시 종결 이후의 역사는 이루어진 계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적용하시는 역사, 성령께서 이미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접목하시는 역사일 뿐, 또 다른 것을 주시는 시대가 아닙니다.

 만약 이것을 열어 놓으면, 반드시 그 다음 단계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들리는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 하기보다는 기도를 해서 내면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려 하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인 진행과정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여전히 방언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으십시오. 하나님은 더 이상 방언으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는 데에 방언이 계시은사임을 아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둘째, 계시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묵상하게 됩니다.

 방언이 계시임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의 유익은 “계시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묵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성경의 논점을 잘 살피라

 이런 교훈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서 말하고 있느냐?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논점이 무엇입니까?

 물론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방언 때문에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교회였기 때문에 이러한 강조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사도의 이 편지를 받고 그릇된 태도를 고친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교회라고 할지라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실질적인 효용성 외에도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똑같은 두 계시라고 할지라도 계시가 ‘실제로 회중들에게 전달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성경이 그 가치를 다르게 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폈듯이 방언과 예언의 차이는 ‘통역’ 밖에 없습니다. 통역이 되면 방언의 가치는 예언과 같습니다(5절).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방언과 예언의 가치는 같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으니 방언은 예언과 동등하다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방언이 예언과 같은 ‘계시와 관련된 은사’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과 예언이 같다’라고 말하는 대신 ‘방언이 예언보다 열등하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계시은사의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계시라는 것은 원래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계시란 그 가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계시 자체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계시가 아니다라는 뜻은 아닙니다(이런 입장은 바르트의 입장입니다). 계시는 물론 그대로 있어도 계시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머리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저 하늘 저편 어딘가에 계시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세계에 머무르시기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계시’입니다.

 따라서 계시란 본질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계시는 땅에 파묻혀 있지 않습니다. 계시는 사람들에게 선언되고 선포되고 전달됩니다. 이 사실, 곧 계시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왜 성경이 방언도 예언도 모두 다 계시와 관련된 은사인데 둘을 동등하다고 하지 않고 방언이 예언보다 열등하다고 말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닫힌 채로 그대로 있는 문’입니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니 문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닫혀 있는 문입니다. 통역을 통해 열어야 비로소 예언처럼 계시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2) 알려지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계시은사임을 알게 되는 일을 통해서 단지 현대의 문란하게 행해지는 방언의 폐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 외에도 또다른 유익을 얻게 됩니다. ‘계시의 중요한 속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려지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6: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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