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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sermon
주일오후예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9-03 (일)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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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일 제31주일 설교
천국의 열쇠
2017년 9월 3일 제31주일 설교
  본문 : HC 31주일
 성경 : 마16:13-20; 마18:15-20; 요20:19-23, 계3:14-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5주일에서 30주일까지의 본문이 성례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시행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형식(외형)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표와 인을 사용하여 우리를 실질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 주일 예배에서 거룩한 성례들을 사용할 때, 외형이 아닌 ‘실질’을 붙잡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형식주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세례와 성찬의 포맷이 우리에게 은혜를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와 성찬이 “표시하는 실질”이 우리에게 은혜를 수여합니다. 세례 안에 담겨진 ‘죄씻음’이 우리에게 은혜를 수여하는 것이며, 성찬 안에 담겨진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공효’가 우리에게 은혜를 수여합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합시다.

오늘 우리는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으로 교리문답 제 31주일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바로 이 ‘실질’에 대단히 주목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의 열쇠에 관하여 ‘실질’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채 외형적으로 ‘천국의 열쇠가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교회란 단순히 천국을 열고 닫는 권세를 지닌 거대한 지배세력으로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기관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로마교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열쇠’에 대해 배우면서도 이 천국의 열쇠에 대한 가르침의 진정한 본체적 의미, 그 실질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그 중심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에서의 ‘실질’의 문제
1) 세례에 있어서 실질에 관한 문제는 “세례를 베푸는 수세자의 권위 문제”입니다.
이는 실제로 교회 역사 안에서 몇 번이나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교회 때의 도나투스 논쟁을 들 수 있겠습니다. 도나투스파는 어거스틴 시대에 어거스틴과 논쟁을 한 분파인데, 쉽게 생각하시면 ‘분리주의’ 이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순결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가톨릭 교회를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가는 정황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세례’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도나투스파는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시에, 순교를 하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타협이나 변절을 하고도 이후에 박해가 끝났을 때 교회 안에서 여전히 성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이 베푸는 성례 역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교회 역사 안에서 이 문제는 “세례를 베푸는 자가 순결하지 않거나 그 지위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가 베푸는 세례가 참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도나투스파는 “거룩하지 않은 사제들은 성례를 집행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어찌 중생이 나올 수 있으며, 거룩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어찌 거룩함이 나올 수 있는가? 자기에게 없는 것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세례를 부정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를 통해 재현되었습니다. 재세례파 역시 세례를 베푸는 사제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베푸는 세례 역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재세례’ 즉 다시 세례를 주는 자라는 뜻으로 ‘재세례파’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도나투스파나 재세례파에 대한 공교회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례와 같은 교회가 갖는 신적 능력은 그 기원 자체가 신적인 데서 온다.”
그래서 그는 도나투스파가 “신앙이 없는 사제에게 신앙을 받는 사람은 신앙이 아니라 죄책을 받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나는 그로부터 죄책이 아니라 신앙을 받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어거스틴의 대답은 세례의 능력은 세례 집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칼빈 역시 기독교 강요에서 한 항목 전체를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할애하여,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 세례의 능력이 집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생각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할례와 비교하면서 “유대인들은 불결하고 배교한 제사장에게라 할지라도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야 한다거나 그 할례가 무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첨언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문제가 있는 세례를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다시 세례를 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점, 세례의 원천이 집례자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고백한 역사적 사건들 때문입니다.

2) 성찬 역시 마찬가지의 요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선 주일들에서 성찬에 대해서 배울 때 계속해서 강조된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분의 공로에 효력이 있다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표징으로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표징이 실체의 자리를 빼앗게 될 때 그것은 마술이 되고, 오히려 저주받을 우상숭배가 됩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외형적인 것 대신 ‘본질’, 즉 ‘실질’에 대한 강조점이 나타납니다. 성찬에서도 중요한 점은 그 떡과 포도주가 어떠하냐?가 중심이 아니라, 그 떡과 포도주가 나타내는 바 실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성찬시간마다 “여러분! 땅에 있는 떡과 포도주에 마음을 두지 말고, 눈을 들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인 저 하늘의 떡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라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열쇠’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도 언제나 그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거대한 권력기관들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정부의 공권력, 돈, 미디어, 정보 등)
그런데 이러한 기관들이 가진 권력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기관들이 가진 권력은 제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겨우 이 땅에서 권세를 부리는 것에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 83문의 대답을 보면 ‘천국의 열쇠’라는 것은 사람에게 천국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땅에서 행하는 제한적인 권력도 이렇게 대단하다고 한다면, 누군가를 천국에 보내기도 하고 지옥에 보내기도 하는 권세를 가진 어떤 기관이 있다고 하면 그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천국의 열쇠’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질’을 함께 말해야 합니다. 이것을 함께 하지 않으면 교회는 인간영혼의 생사여탈이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을 쥔 기관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을 행할 권세를 가지고 있는 목사는 하늘 아래 최고의 권력자가 됩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교황이 이런 권세를 직접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에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교회의 권위에 믿음 때문에 봉사하고 복종한 것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 두려워서’ 교황과 교회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교회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이유는 이렇게 교회나 목사나 교황이 권력을 휘두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83문에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열쇠’가 무엇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교리문답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길래 교회가 이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한 실질을 깨닫고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 열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1. 교회에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는 사실
성경은 아주 명시적으로 천국의 열쇠가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신자들이 이런 개념에 낯선 이유는 현대의 교회들이 구원을 항상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대일 관계”라고 생각하도록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시종여일하게 이 사실을 말해 왔습니다. 교회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83문의 질문과 대답에 보면 이 천국의 열쇠를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복음의 강설’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의 권징’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리문답의 이런 대답은 성경에서 직접 가져온 것입니다.

2. 성경적 근거
1) 마16장
천국의 열쇠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본문은 마태복음 16장과 18장입니다. 이 본문들에는 “주님께서 직접 사람들에게 천국 열쇠를 수여하시는 장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고백하자, 베드로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주의 그리스도됨,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지식과 고백은 결코 그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반드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믿음의 출처, 고백의 출처는 반드시 성부 하나님이시지 인간의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내용에 대비하여 우리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18절에서 주님께서는 “그래서 내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 교회’(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고는, 19절에서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땅에서 어떤 사람을 향해 천국열쇠의 권능을 행하면 그것이 하늘의 진짜 천국에서도 그대로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2) 마18장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에도 같은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을 16장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18절에서 똑같은 말씀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16장에서 ‘천국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면서도, 16장의 내용이 ‘베드로의 고백’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말씀(혹은 신앙고백)’에다 이 천국열쇠를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18장의 내용은 그 바로 앞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에 대해 어떻게 ‘권징’을 행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내용은 특별히 권징을 행할 때에 거기에서 천국문이 열고 닫힌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도 주님께서 땅의 교회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3) 요20장
요한복음 20장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이 그려져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과 같은 주일에 저녁 무렵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19절). 그런데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을 닫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22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구절인 23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교회에게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죄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어와서 지붕에서 달아내렸을 때, 예수님께서“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셔서 둘러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질타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주심으로써 이 “죄사함의 권세”를 수여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 말씀은 ‘내가 내 맘대로’ 누군가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앞서 우리가 살핀 두 구절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만 하실 수 있는 권세인’ 죄사함의 권세를 ‘교회에 위임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사해주시지만, 땅의 교회가 죄를 사하거나 정할 때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하심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실효가 되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구절들에 근거해 볼 때 하나님께서 땅의 교회에게 죄사함의 권세, 곧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안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 내용을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외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TV보고 예배 드리면서 천국에 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집행하시는” 이 주님의 뜻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없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열쇠가 교회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3. ‘실질’로서의 말씀
이제 중요한 문제인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천국열쇠가 교회에게 주어졌기에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세상의 최고의 권력으로 남용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교회를 보십시오.
교리문답은 ‘천국 열쇠’의 본질이 “기관에 위임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위임된 것”이라 설명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천국 열쇠를 ‘교회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교리문답이 천국의 열쇠를 설명할 때 ‘교회라는 기관을 주축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음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본질’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 위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주님께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셨다고 하면, 단순하게 “교회라는 기관이 그것을 받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교회는 무시무시한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리문답은 성경의 본의를 따라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83문. “천국의 열쇠는 무엇입니까?” 답. “거룩한 복음 설교와 교회의 권징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

분명히 교회가 언급됩니다. 하지만 천국 열쇠를 받은 교회는 천국 열쇠를 좌지우지하는 기관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문구에서 강조가 주어진 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음의 강설’이요, 또 하나는 ‘교회의 권징’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회의 권징’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교훈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사실상 “말씀으로 살도록 신자의 행실을 바로잡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실은 ‘권징’이라는 것은 말씀이 바로 서게 하기 위한 ‘도구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은 권징이라는 것은 “말씀과 성례의 보조적 수단”입니다. 즉 말씀과 성례는 믿음을 직접적으로 세우고 유지하게 하지만 권징은 말씀과 성례 없이 혼자서 존립할 수가 없는 보조적 도구입니다. 바르게 바로잡을 기준이 없는데 무엇에다 대보고 권징을 하겠습니까? 즉 천국의 열쇠로 둘이 언급되었지만, 사실은 실제적으로는 말씀이 강조되고 있고, 권징은 이 말씀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방편입니다.

여기에 천국 열쇠의 ‘실질’이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합시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교회법을 발표했을 때, 의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예를 들어 의회는 교회가, 목사가 성도를 권징할 수 있는 권한, 수찬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칼빈이 달라고 한 것에 대해 격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칼빈과 의회가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권징이 ‘말씀으로 징치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권세’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그것이 ‘권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이 생각하는 교회의 다스림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이 전혀 다르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신앙적으로 범죄한 사람을 사회법적으로 벌을 주는 것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와 정부가 붙어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못 할 때 사회법을 어긴 것처럼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교회의 영적 다스림은 세속의 사회법적 다스림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교회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극형은 ‘출교’일 뿐입니다. 그 사람을 천국에서 쫓아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사회생활을 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출교 뿐’이 아니라 그런 사람은 ‘화형이나 교수형’에 처할 수도 있었던 사회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의회는 칼빈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이 권징을 이해했습니다. 권징을 세상권력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칼빈의 요구를, 즉 교회가 권징권을 갖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천국열쇠의 실질’을 의회처럼 오해하지 말도록 합시다.
천국 열쇠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생사여탈을 매고 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사람에 대해 “독점적 권한을 가진다”는 식의 세속적 권세의 측면이 아닙니다. 교회가 천국을 열고 닫는 것은 엄청나게 무섭고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것은 세속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 세계, 사회법적 세계,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에서는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우리가 제대로 된 천국열쇠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면, 천국 열쇠에 대해 배우면서 ‘말씀’이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가 있다는 것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두려운 기관”을 발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말씀의 경이로움”을 알고 거기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 천국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1) 천국의 열쇠가 이 땅의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2) 그리고 그 열쇠가 ‘복음 설교’와 ‘권징’이라는 것, 3) 그리고 이 천국의 열쇠를 이해함에 있어 ‘실질’이 중요한데, 그 실질이란, 교회라는 기구에 이 열쇠를 주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에 이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이해함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시종일관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과연 천국의 열쇠를 통하여 매고 푸시는 일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고 계시다는 것을 실제로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는데, 이것을 경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통치자들은 칼과 창으로, 세력과 권세로 협박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서워하고, 영적인 통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1) 천국을 여는 복음 설교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정치적인 힘, 교권을 갖는 것, 사람들을 포섭하여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는 것, 행정적인 능력이나 경영학적 능력을 갖는 것과 같은 것들이 실제로 교회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복음 설교는 (말로는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의 첫 번째 열쇠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2) 천국을 닫는 교회의 권징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통해 권고나 벌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이 천국의 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기분을 더 중시합니다. 교회가 벌을 주면 그 중차대함을 깨닫고 각성하기보다는 자기가 상처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령 교회가 징계하더라도 교회를 옮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천국의 둘째 열쇠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천국의 열쇠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며, 훈련하시는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도구를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므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바로 이 도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천국의 열쇠를 무시하는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다스리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첫 번째 열쇠 : 복음 설교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첫 번째 열쇠는 “복음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설교를 통해서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 설교가 천국의 문을 ‘먼저 열고’, ‘그 다음에 닫는다’고 말씀되어 있는 것은 복음 설교의 능동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권징은 ‘먼저 닫고’, ‘그 다음에 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권징이란 ‘잘못되어 있는 것이 전제된 상황’에서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복음 설교는 ‘먼저 여는 데’ 초점이 주어져 있습니다. 즉 복음 설교는 사람을 구원함에 있어 더 능동적인 역할, 즉 실제로 사람을 천국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는 일차적인 도구입니다. 말하자면 복음 설교는 구원이 없던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구원을 수여하는, 천국의 문을 여는 능동적인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 설교의 어떤 점이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것입니까?

교리문답은 천국의 문이 언제 열리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사람들이 복음의 약속을 받을 때 죄를 사하신다는 메시지가 개인에게나 공적으로 선포될 때”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진술은 성경의 교리를 요약한 것으로, 이 짧은 구절 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여러 가지 사실들이 함께 나열되어 있습니다.

1. 첫째로, 이 구절 안에는 복음이 무엇인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원래 복음이란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의 입을 빌어 로마서에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직접적인 원천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은 “믿음은 말씀을 듣는 데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에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자주장사 루디아가 회심하게 될 때의 정황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심, 구원받게 되는 능력이란....언제나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사실, 곧 복음이 신자들을 구원한다는 내용이 교리문답 안에 선언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믿는 자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교리문답의 대답 안에는 복음이 무엇인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2. 그런데 이 복음은 ‘공적인 선포’를 가리킵니다.
교리문답은 바로 이 복음이 “신자들에게 선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84문의 대답은 “사람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진다는 사실이 공적으로 선언될 때”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하는 능력이 언제 발휘됩니까? 이를 조금 다른 말로 하면 “언제 천국의 문이 열립니까?” 그 때가 바로 이 복음의 내용이 ‘공적으로 선포될 때’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적 성향이 ‘개인주의적’으로 흐르면서, 죽어버린 것은 단지 “교회의 공동체성” 만이 아닙니다. 신자의 신앙이 개인주의적으로 흐르면 단지 공동체성만 죽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도 죽어버립니다.
성경이 그리고 있는 복음은 ‘사적인 대화’가 아니라 ‘위대한 선언’입니다. 즉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복음이란 것은 원래 사람들에게 놀라운 메시지로 “선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복음은 ‘공적인 설교’라는 양식을 띄게 되어 있습니다(이런 점에서 설교는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설교는 ‘위대한 선언’이며,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자기 자녀들을 부르시고 계시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을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행위가 대단히 ‘내면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즉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혼자서 누구에겐가 복음에 대해 설명을 듣거나, 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리고 있는 신자가 구원받는 방식은 ‘공적이고 선언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사람들을 개개인적으로 사적인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아니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당연한 방식은 복음이 공적인 선포를 통하여 들려지는 방식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가장 성경적이고 합당한 방식은 “교회의 설교를 통해서”입니다.

이 그림이 바로 여기 교리문답에서 그리고 있는 ‘천국열쇠’의 그림입니다! 
언제 천국이 열립니까?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문이 열리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설교가 강단에서 쏟아질 때! 바로 그 때 천국이 열리는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의 눈으로 이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데에 가장 합당한 방식은 내가 사적으로 그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이 공적인 방식을 통해 회중에게 선언의 형식으로 전해지는 설교에 그 사람을 맞닥뜨리게 해서! 그 복음의 선포와 대면하게 해서!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설교의 차별성과 예배의 차별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와 모임, 성경공부와 설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예배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권하시고, 책망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 사실이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이 무엇이 예배이고, 무엇이 예배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우리가 매주 교회 예배에 와서 드리는 이 예배가 바로 천국의 열쇠로 천국의 문을 열고 하늘의 보화를 쏟아내고 있는 장소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우리에게 천국의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문답은 ‘복음’이 천국의 열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충분히 말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이 복음의 ‘선포됨’에 무게를 두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공적 역할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이 천국의 열쇠가 아니라 ‘복음 설교’가 천국의 열쇠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천국의 문을 연다....고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은 그 복음이 설교를 통하여 선언되는 순간입니다. 즉 설교가 구현될 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3.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직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루터의 후계자였던 멜란히톤은 그의 ‘신학총론’에서 바로 이 부분, 즉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천국열쇠에 대해 다루는 부분인 “교회의 열쇠의 권한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천국 열쇠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분자’를 다룹니다. 멜란히톤은 천국의 열쇠가 직분자를 통해서 공적으로 집행되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열쇠를 바라볼 때 직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자들이나 교회의 사역자들을 순종해야 하고 그들의 명령하는 권세를 존중해야 한다...우리에게는 교회의 열쇠의 권한과 섬김을 높이고, 참되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사와 더불어 이를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은사로 높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려진 인류에게 자신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이 열쇠의 권한으로 그의 말씀과 명령을 유효하게 하여 우리를 영생에로 다시 이끄시기 때문이다...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한 순종을 해야 하므로 우리는 목사의 사역과 설교에 순종해야만 하니, 이는 그가 명령하는 권세와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 설교의 권한은 교회의 직분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들은 대로 ‘교회라는 기구’, ‘직분이라는 기구’에 대해서만 오해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국의 열쇠가 말씀을 맡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의 권세에 복종하는 이유는 그들의 ‘인간적 권세’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기관 안에서 그들이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행하는 권세가 ‘말씀을 대리하는 권세’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멜란히톤의 그 책에 보면 이 내용 바로 다음에 말씀사역자가 말씀의 권세가 아닌 사적인 것으로 개인을 억압할 때는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곧이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열쇠가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교회의 직분자들의 공적 사역에 충분히 존경하는 마음과 복종하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 말씀은 우리에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따라서 이 공적 말씀의 선포를 듣고도 믿지 않고 외식하는 자에게는 천국이 닫힙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 선포의 능력 때문에, 이 공적인 복음의 선포를 듣고도 믿지 않거나 외식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 시점에서 하늘의 문이 닫힙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배의 복음 선포를 통해 천국이 열리고, 어떤 이에게는 바로 그 시점에 천국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의 선포는 필연적으로 반대급부를 생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질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계적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언약적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지 않은 자에게는 화를 가져옵니다.
천국을 여는 열쇠가 어떻게 동시에 천국을 닫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까? 교리문답이 대답합니다. “돌이키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가 머문다는 사실이 공적으로 선포되고 증언될 때 천국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문이 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은 “이를 믿으면 너희에게 열린다”는 것이고, 천국의 문이 닫힌다는 것은 “이를 믿지 않으므로 너희에게는 닫힌다”는 것입니다.

복음 설교가 천국의 문을 열 뿐 아니라 동시에 닫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합시다. 동일한점에서 권징이라는 것은 복음 선포의 이 기능의 확장에 해당합니다. 권징이 힘을 갖는 것은 “말씀의 도구일 때” 뿐입니다. 권징은 자체적으로 서지 않고 말씀에 기대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원래 본연적으로 천국의 문을 닫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설교되었는데 거기에 아멘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히는 것이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교회의 권징’입니다.

두 번째 열쇠 : 교회의 권징

그래서 교리문답은 천국의 두 번째 열쇠를 ‘교회의 권징’이라고 하였습니다.
권징이 천국의 열쇠인 이유는 이 권징이 “말씀으로 통치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권징은 ‘닫는 역할’을 먼저 합니다. 즉 신자가 말씀을 듣고도 거기에 대해 불응할 때 도구로서 권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를 조금 다르게 말하면 첫 번째 열쇠인 ‘복음 선포’가 사람에게 거부되었을 때, 두 번째 열쇠인 ‘권징’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권징은 항상 첫 번째 열쇠가 제대로 수행되도록 하기 위한 수행원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 때문에 어떤 목사님은 ‘교회의 권징’을 ‘말씀의 권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권징’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어로 ‘권징’이라는 말인 discipline은 원래 ‘제자’라는 뜻의 disciple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이 ‘제자’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원래 교회 밖에서 일반적인 용도로 discipline이라고 하면 그것은 ‘훈육’,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즉 ‘권징’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뜻은 원래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제자도’는 강조되면서 ‘권징’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아주 희한한 일입니다. 원래 교회의 제자도란 ‘권징’입니다. 제자됨이라는 것은 혼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치리에 복종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에서 공적으로 선포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도록 권면받는 일”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이것이 discipline, 곧 ‘권징’, 혹은 ‘훈육’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권징은 밀접하게 첫 번째 열쇠인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권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태복음 18장 말씀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권징을 시행토록 하는 일을 명하시면서, 그것이 교회 기구의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하늘의 권세를 거기에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교리문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리문답 85문의 답을 보시면,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라고 하면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권징 절차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가 형제로서 사적으로 권면하는 것이요, 이를 듣지 않을 때 교회의 치리회에 알리는 것이요,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을 때 그들에게 성례가 금지되고 교회의 교제권 밖으로 내쫓깁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듣지 않을 때, 그들은 교회 밖으로 쫓겨납니다.
마지막 구절에 유의하십시오. 여기에 교회의 권징에 신적 위임이 있음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어떤 사람이 권징을 끝까지 수납하지 않아서 수찬이 정지되고 출교를 당했을 때 ‘인간공동체인 교회라는 곳’에서 쫓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교리문답의 마지막 문구는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라고 말씀함으로써 땅에서 매었을 때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즉 교회의 권징은 말씀 선포를 따라 신자가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요, 또한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때에 그에 대하여 제제를 가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공적으로 인준하셔서 신자가 공교회의 이 가르침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할 때 땅에서 쫓겨나면 하늘에서도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권징은 신자를 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여는 것’으로 시작되는 복음 설교에도 언약의 반대편에 있는 ‘닫는 것’이 언급되어 있듯이, 먼저 ‘닫는 것’으로 시작되는 권징에도 그 반대편의 ‘여는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여는 것’이 언급되었다기보다, ‘열기 위해서’ 닫는 것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권징’이라는 말의 의미를 기억하십시오. 권징은 ‘신자를 훈련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훈련을 위한 징벌은 벌 주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벌을 통하여 바른 태도를 되찾게 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권징이 참으로 지향하는 바는 권징을 받는 대상이 그 벌로 말미암아 죽어버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다시 살게 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본문을 읽었는데, 각각 복음 설교와 권징에 관련된 본문이었습니다. 권징에 해당하는 본문으로 읽었던 계시록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본문 안에는 우리가 흔히 사영리에서 전도할 때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할 때 사용하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의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한 말씀이 아니고 ‘권징’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14절부터 살펴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내용인데, 15절과 16절을 보면 이 본문의 내용은 “미적지근한 신앙을 가졌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대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그런데 이 책망과 징계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에 오늘 우리가 살피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므로”(17절) “흰 옷을 사서 입어 수치를 면하고 안약을 사서 발라 눈을 보이게 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18절). 그리고 이를 정리하자면 19절 말씀대로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 회개하라! 는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이 무엇입니까? 20절 말씀은 ‘성찬의 회복’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은 주님의 상에 다시금 초대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징계와 책망 가운데 있는 자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들은 주님의 상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이 ‘권징’입니다. 교회 정치 용어로는 이것을 ‘수찬정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은 이 “상에서 내어쫓김”이 회복되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에 대해서 여러 주간을 배웠기 때문에 성찬으로부터 이탈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일인지를 성도들 모두 다 공감하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권징’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훈육되지 않을 때, 그 훈육을 위하여 제제를 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권징입니다.
그래서 권징의 목적이 어떤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달합니까? “이 교회의 권징이라는 문 두들김”(교회의 문 두들김[권징]이 주님의 문 두들김으로 묘사되었다)을 ‘듣고’, ‘문을 여는’ 자에게는 “다시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는” 일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징의 도달지점입니다. 즉 권징은 사랑이요, 권징 곧 훈련은 신자가 죄를 제어하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지는 회초리입니다.
교리문답의 권징 파트 마지막 부분에 이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돌이키기를 약속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닫혀진 천국의 문이 다시 열리는 것입니다. 즉 권징은 ‘먼저’ 닫기는 하지만, 천국의 열쇠로서 신자들에게 천국을 ‘닫고 여는’ 역할 모두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31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천국의 두 가지 열쇠를 배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복음 설교요 다른 하나는 권징입니다.
복음 설교는 천국을 먼저 여는 역할을 하고, 이는 ‘공적인 선포’로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복음 설교에도 ‘닫는’ 역할이 함께 있습니다. 권징은 말씀의 도구로서 신자를 훈련케 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먼저 ‘닫는’ 역할을 통하여 범죄하는 신자에게 경각심을 주고 매를 맞고 복종케 함으로써 천국의 문을 ‘다시 여는’ 역할을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설교의 서두에 드린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천국의 열쇠가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단지 여러분이 머릿속에 이것을 집어 넣어 놓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복음 설교가 천국의 열쇠라고 아무리 머릿 속에서 인식하고 있어봤자, 주일 설교 시간에 하품이나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천국 열쇠를 이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교회의 권징이 신자를 훈련시키는 도구라고 아무리 머릿 속에서 인식하고 있어봤자, 자기가 정작 그 회초리를 맞을 때는 아주 악한 복음주의자가 되어서 “그까짓 교회 안 나가면 그만이지”라고 하면서 다른 교회로 가버린다면 그건 권징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권징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교회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열쇠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냄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이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마음속에 새기고 손과 발로 행해 나갈 때에 말씀의 복과 은혜가 실제로 그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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