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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8-20 (일)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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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제25주일 교리문답 설교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성례
2017년 8월 20일 제25주일 교리문답 설교
설교본문 : hc25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례가 눈에 보이는 어떤 표징이기 때문에, 성례는 그 교회의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대접을 받게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례의 영향력은 가히 엄청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례는 단순히 “말씀을 인치는 표” 정도의 가치가 아닙니다. 성례 자체가 바로 구원에 영향력을 주는 엄청난 힘을 가집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외형중심적인” 입장 때문입니다.

이와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재세례파적인 입장인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형식주의”입니다. 본질은 중요한 것이지만 형식이란 가능하면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는 현대 복음주의의 전반적인 흐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성례는 사실 무가치한 것입니다. 성례는 표와 인인데, 표나 인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단지 본질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현대 복음주의가 자꾸 예배형식 등을 허무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면 성례에 대한 입장 역시 이해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의 교회들은 성례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교회 안에 성례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으나 성도들이 실제로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했거나, 존재하기는 하지만 가치는 미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리문답이 가르치는 성례의 위치는 단호합니다. 65문 끝부분을 보십시오. 교리문답은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세게 한다” 고 표현합니다. 65문 앞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거듭남, 즉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원동력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성례”에 의해 강화됩니다. 교리문답은 “성례가 믿음을 강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즉 성례는 “보이는 말씀”으로서, 믿음을 생성시키는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66문의 중간 부분도 보십시오.

      “성례가 시행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 약속을 우리에게 훨씬 더 충만하게 선언하고 확증(인)하십니다”

67문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구원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에 있다는 사실을 1) 복음으로 가르치고, 2) 성례로 확증하십니다”

교리문답은 성례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는 도구요, 성례는 믿음을 굳세게 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말씀이 모두를 차지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따로 또 성례를 주셨을까요? 성례의 필요성, 즉 말씀을 증언하고, 강화하고, 표로써 나타내기 위한 성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마도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설명한 것만큼 잘 설명하기는 힘들 듯 합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 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괴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성례는 말씀을 돕습니다만, 그것이 “말씀이 부족해서”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나 우리는 부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으나 우리는 보이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방금 읽은 강요의 말씀에서처럼 성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수준에 맞춰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례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복된 말씀을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전달자로 선지자를 선택하셨을 때, 우리는 그 도구가 비록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도구일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믿음을 강화하는 도구로 삼으셨다면, 우리는 그 도구만이 실제로 우리 믿음을 강력하게 하는 것임을 믿고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성례만이 필요한 이유 - 구약 성례의 완성

구약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각양 다양한 방법(홍해사건, 광야의 만나 등)들로 “말씀을 강화하여, 이스라엘의 믿음을 굳세게” 하셨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분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수많은 표징들을 주셨고, 그것은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강화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가 믿음을 강화한다”고 하는 교리문답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 성례가 우리의 믿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임을 잘 알아서 이 성례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세례와 성찬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말씀을 듣다 보면, 왜 구약에는 그렇게 다양했던 성례들이 지금은 “세례와 성찬” 두 가지 밖에 없는지 궁금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례의 종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적으로 로마교회들은 이 성례를 자기 마음대로 여러 개로 만들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일곱 가지의 성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례와 성찬 외에도 우리의 입교에 해당하는 견진성사,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 결혼을 성례로 받아 결혼성사, 사제 서품을 성례로 만들어 신품성사, 장례식도 성례로 간주하여 종부성사...이렇게 일곱 가지 성례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잘못된 것입니까? 왜 구약에는 풍성하게 많은 성례를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례를 단 두 가지로만 제한하셨습니까? 그리고 로마교회가 성례를 많이 만든 것은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을 거스르는 것입니까?

이는 성례의 신약적 성취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 쉽게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이 설명한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시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서 여러 가지 성례를 주셨다. 예컨대 만나와 반석에서 흐르는 물과 놋뱀과 그 밖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이런 변천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이런 무상한 형태에 머물지 말고 더 좋은 것, 폐하거나 끝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기다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된 후로 우리는 사정이 훨씬 달라졌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골2:3) 때문이다. 한없이 풍부한 이 보화에 어떤 새로운 것이 첨가되기를 바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갈망하고 바라보며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가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두 성례 모두 말씀을 지시하여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만, 구약의 성례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 성례는 오로지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이 성취된 후에는 신약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만이” 그 효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주님께서 제정하신, 영원히 행해져야 할 유일한 두 가지 성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이 떡과 잔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시대에는 단 두가지의 성례만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경에 정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강화화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성경에 정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도구들이 아니라면 다른 도구들은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무언가 영험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믿음을 강화한다기보다 그릇된 신앙을 우리에게 심어주거나,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실제적인 효과는 없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성례만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는 점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성례가....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들 외에 다른 데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원리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고, 믿음을 강화하는 성례도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서 성례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로마교회와는 조금 다르게,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성례”라고 지정만 하지 않을 뿐이지, 실제 성례는 믿음을 별로 강화시켜 준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이상한 것들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로마교회와 같은 “직접적인 성례에 대한 손상”도 우리는 주의해야 하겠지만,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방식...즉, 성례라고 실제 이름 붙여져 있는 것은 신자의 삶에 그리 영향력이 없고, 성례 외의 다른 것들이 실제 성도의 믿음을 강하게 한다는 식의 생각은 대단히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에게 가르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설교를 정하셨다면, 우리는 설교 밖의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더 효용을 가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사실 교회들 안에 만연해 있는 “성경공부”나 “스터디” 같은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실제로 말씀에 대해 열정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설교는 그냥 일상적인 양식이고, 실제로 우리 신앙을 자라게 만드는 것은 소그룹으로 모여서 하는 스터디나 성경공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양식을 위해 목사와 설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서 듣는 설교가 우리의 양식에 가장 훌륭한 양약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이 실제적으로 내 신앙을 자라게 한다고 믿는 것은....교회 안에 진실한 설교가 없기 때문에 자라게 된 병폐이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성도는 설교 말씀만을 가지고서도 믿음이 잘 자라야 합니다.

비슷하게.....“믿음을 강화하는 성례”라는 차원에서도 많은 교회들 안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성례는 실제 믿음을 별로 강화하지 않고”, 다른 것들이 오히려 훨씬 더 내게 은혜가 되고, 감동을 주고, 믿음을 성장시킨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를 저는 간증과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례가 자신의 믿음을 강화한다고 믿는 대신에 간증이나 찬양이 자신의 믿음을 강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증을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찬양을 할 때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불타올라서 믿음이 더욱 자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성례”를 주셨습니다. 우르시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대개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시는데, 그 사역은 말씀과 성례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더 지혜로우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칼빈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표현을 써서 당시의 모습을 비판하는데...이것은 마치 성례를 경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집행되는 성례들이 그 시초의 순결성에서 많이 타락한 것을 본다. 어디를 보아도 행렬과 의식과 무언극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례가 성립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언급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들은 무수한 의식에 짓밟혀 머리를 들 수 없게 되었다. 세례에서는 빛나며 주시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 즉 세례 자체를 볼 수 없지 않은가? 성찬은 미사로 변모된 후에 완전히 매장되었으며, 이런 것 외에는 일년에 한 번 보이는 찢기고 잘린 반조각의 성찬 뿐이다”

칼빈은 성례가 다른 여러 가지 의식들에 짓눌려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로마교회는 성례의 충분성에 못마땅했겠지요. 그래서 무언가를 자꾸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례가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만든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성례에 참으로 믿음을 강화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리문답 25주일을 통해서 말씀을 강하게 하는 성례에 대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처지를 살피셔서 말씀을 빛나게 하며, 우리의 믿음을 튼튼하게 하시기 위해 성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배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배려를 감사함과 믿음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례를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으로 여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어떤 수단들보다 우리의 믿음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이 성례들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위에 참된 성례들을 세우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바른 의식으로 세워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성례에 대한 바른 인식을 주셨기를 바라며, 이 말씀 안에서 참된 진리의 기쁨을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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