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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관련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19-02-10 (일)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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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당신께 두도록 장자를 봉헌할 것을 요구하셨다
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부제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당신께 두도록 장자를 봉헌할 것을 요구하셨다.

성경본문 : 출4:18-26, 13:1-16                                           이종덕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회중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이며 낙원에서 울려퍼진 복음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를 증거합니다. 한 사건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를 지니며 또 그것이 향후 전개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미리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성경의 한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당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를 읽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 그 결과 신약성도인 교회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돌봄 속에 번성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7절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반복되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씨’의 번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의 번성과 관련해서 본문은 요셉과 연관하여 주목하게 합니다. 창세기 45장에서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극진히 환영하고 대접합니다. 애굽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선물로 줍니다. 이는 애굽에게 식물을 제공해 준 요셉의 연고로 말미암아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행위를 단순한 요셉에 대한 호의만으로 읽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때의 애굽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음화된 애굽’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바로가 말하길, “바로의 눈과 그 모든 신하들의 눈에 요셉의 말이 좋게 보였다.”(41:37)고 말합니다. 38절에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하며 요셉을 애굽의 둘째 치리자의 위치에 둔 것을 볼 때, 바로의 마음을 강타한 하나님의 은혜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요셉이 온의 제사장 보디베랴의 딸 아스낫과 결혼합니다.(41:45) 보디발의 아내를 거절하여 피했던 요셉이 이방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회심한 애굽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후에 형제들과 상봉한 요셉은 자신의 지위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지자(꿈꾸는자)인 요셉을 바로의 아비와 주로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복음의 광채가 요셉을 통하여 온 애굽을, 나아가 열방을 비추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의 부양자인 요셉의 그늘 아래에서 야곱의 후손들은 번성하였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장 6절은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여전히 번성했고 심히 번성하였습니다. 애굽 왕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부양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야웨 하나님이십니다. 사람 보호자인 요셉은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부양자가 되셔서 그들을 기르고 번성하게 하심을 말해 줍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통해 한 나라를 세우시고 온 세상 나라를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서다.

 그런데 그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8절) 여러분!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요셉이 누군지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요셉을 인정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요셉 당시에 애굽의 통치자는 셈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왕조가 바뀌어 애굽의 본토인의 다른 왕조가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새 왕조인 애굽의 바로는 이전 요셉이 행한 일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요셉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려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입니다. 은혜를 잃어버린 자,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은혜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자! 이것은 배도자의 모습입니다. 비록 애굽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처럼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요셉을 인정치 않으려는 새 왕조로서의 애굽은 영적으로 설명하면 배교입니다.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평안과 생명을 보호받던 상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에 대하여 심판하기까지 잠시의 시간 동안 오히려 배교자 애굽을 인하여 이스라엘은 핍박과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학대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사건을 불러왔습니다. 첫째는 애굽이 자신들이 영원히 거주할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상들이 묻힌 열조의 땅으로 돌아가야 함을 상기시켰습니다. 둘째는 고역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시련은 기도를 불러왔고, 기도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현상은 학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게 되었다고 12절은 말합니다.

 배교한 애굽, 사단화된 애굽은 다시 사단의 방편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며 복음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박해받는 모습은 곧 배교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빛 안에 세상이 나아와 교회의 복에 참여할 때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의 신분적 역할을 말해줍니다.

 장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많은 아들 중 차서를 따라 첫째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상속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마 본문은 피조세계에서 모든 열방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설명하는 말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된 아들이란 말입니다. 구원 계시역사에서 한 위치에 앉혀진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명을 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하나님의 이 일을 훼방하였습니다. 요셉과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치 않는 바로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하였습니다. 노역이 점점 심해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사내아이를 다 하수에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바로를 심판합니다. 그 내용은 4장 23절에 있는 것처럼 바로의 장자를 죽이려고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은 바로와 애굽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출애굽의 사역을 수행해야 할 모세에게 이스라엘 지위와 소명에 대한 커다란 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24절에 야웨께서 모세의 장자를 죽여 모세의 가정을 멸하려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지금은 모세의 가정을 멸하려 하십니다. 4장 앞부분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워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거절하고 하나님께서는 강권하여 보내시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의 숙소에서 야웨께서 ‘그’를 죽이려 하십니다. 대관절 이 일이 무엇이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이 사건이 계시해 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영적 교훈을 주고자 합니까?

 이는 피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미래와 소망이심을 나타내어 우리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의 가정에 닥친 위기(예비적 유월절)

 피는 땅을 더럽히고 반드시 ‘보수자’를 부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땅은 그 의로운 자의 피를 받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창4:10)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2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피의 보수자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요셉의 연고로 애굽이 정결하게 되고 야곱 집이 일정한 기간동안 그 곳에서 보호받고 번성하도록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셔서 애굽과 온 땅에 음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을 인정치 않는 새 바로가 들어서서 이스라엘을 압제합니다. 그러나 이런 학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사내 아이들을 다 하수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땅과 강은 이제 더럽혀졌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보복을 가져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민35:32-34, “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


 출 7:17절 이하를 보면 피로 물들여진 애굽의 나일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애굽 온 땅이 보수를 부르는 피로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의 날이 이르면 반드시 그 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면해야 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애굽 땅에 거하는 모든 생명을 다 포함합니다. 애굽 땅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그 땅에 사는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출 4:23의 바로와 애굽의 장자의 죽음은 앞으로 일어날 '피의 보복'을 미리 보여줍니다. 장자는 그 가족의 중심이며 미래입니다. 그런 이유로 장자의 죽음은 그 가족 전체를 죽이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정을 찾아오신 이유입니다.

 4:24~26절은 그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기가 어려운 성경 난해 구절 중 하나입니다. 24절의 ‘그’가 누구인지, 또 25절의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26절의 피남편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알 것은 히브리어 성경의 24,25,26절에는 개역성경에서 모세로 번역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그’라는 대명사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학자들 간 해석이 분분합니다. 한글 성경에 있는 것처럼 ‘모세’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23절이 바로의 장자를 다루고 있기에 문맥의 대구상 모세의 장자인 ‘게르솜’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모세의 둘째 아들을 가르킨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두 번째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3인칭 인칭대명사)의 선행사는 애굽의 장자들입니다. 이로 보건데 모세의 장자 ‘게르솜’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유는 유월절에 일어날 애굽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당해야 할 그 사망의 위협을 모세에게 미리 체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모세의 가정에 예비적 유월절을 시행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4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은 미리 체험한 유월절에 대한 확고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여러분! 먼저 모세의 가족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민첩하게 행동한 십보라의 행동과 말을 살펴봅시다. 25절에 십보라는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고 우리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는 말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그의 다리에 대었다고 기록합니다. 발 앞으로 번역된 단어가 삼상17:6에서는 다리로 사용됩니다.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모세가 아니라 게르솜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게르솜의 양피를 베어 ‘모세’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게르솜에게 던진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할례의 표가 언약의 표징이며 그 표징이 죄용서와 영생을 나타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 본문은 양피를 발 앞에 던졌다고 말합니까? 이것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보라는 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언약의 피, 할례의 피를 그(게르솜)의 다리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십보라가 한 일은 양피를 베어 던진 것이 아니라 할례의 피를 흘려 게르솜의 다리, 즉 기둥에 바른 것입니다.(닿게 하다)

 전도서 12장 3-4절은 인간의 몸을 집과 자주 비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몸은 성전에 비교되기도 합니다.(고전6:19) 또 아가서는 인간의 다리를 기둥 곧 문설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아가 5장 15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다.”
모세 가정에 심판의 하나님께서 방문하시자 십보라는 피의 보수, 재앙으로부터 그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숙소(집)의 문설주에 피를 바르듯이, 그 가정의 중심이요 미래인 장자의 다리(기둥)에 피를 발랐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같이 행동하셨는지 의아할 수 있고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같이 행동하셔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모세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출생한 이후 지금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3,14)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는 그 백성에서 끊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는 모세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장자 게르솜을 죽이려고 하실 때, 십보라는 할례의 피를 흘려 게르솜의 다리에 발랐고, 하나님께서는 게르솜의 다리에 발라진 그 피를 보고 그를 넘어가셨습니다. 다시 말해 게르솜(모세가정)이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십보라의 행동이 상징하며 보여주는 것은 예비적 유월절입니다. 출12장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초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장자가 죽습니다. 그 가정의 미래인 장자의 죽음은 그 가정에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피를 보수하시는 야웨의 천사가 애굽 온 땅을 치실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은 심판이 넘어갔습니다. 믿음으로 자기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피’를 바른 집이 도피성이 되어 사망의 위협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유월절의 상황이 모세의 가정에 미리 일어난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가기 전 길의 숙소에서 야웨께서는 모세와 그 가정에게 뺏속 깊이 새기며 항상 기억하도록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할례의 피는 곧 피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지시한다.

 이제 25절 ‘피남편’과 26절 피남편의 할례를 인함이라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개역성경번역인 피남편(이쉬,바알)이란 말보다 피신랑(하탄;신랑 사61:10,62:5;렘7:34)이라는 말이 그 의미를 더 살릴 수 있는 번역입니다.

 게르솜은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의 ‘하탄’은 사위, 신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만 유독 ‘남편’(이쉬, 바알)이라 번역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24절의 ‘그’를 모세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문장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의역해야 했습니다. 25,26절 모두 ‘그’를 모세로 번역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번역하면, 너는 참으로 내게 ‘피신랑’이라고 해야 합니다. 피신랑이라 함은 할례의 피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보라가 왜 자기 아들에게 피신랑이라 했을까요? 도대체 무슨 의미의 선언입니까? 대부분 주석가와 설교자들이 침묵하는 이 ‘피 신랑’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피신랑이라는 말이 ‘할례의 피’란 말과 ‘신랑’ 즉 결혼식의 날 밤 곧 첫날 밤의 신랑이란 의미가 결합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첫날 밤에 신랑이 흘리는 할례의 피를 말합니다.

※ 할례의 상징적 의미입니다.
 첫째, 사망과 부활의 상징입니다. 할례는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얻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는 세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둘째, 부끄러운 것을 제거하고 신실한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것; 수5:9) 즉 우리는 죄와 수치를 고백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음이 가려지고 의를 옷입게 됩니다.
 셋째, 장애물 제거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은 그들이 둘 다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 육체(표피)의 장애물이 제거되어 아이를 갖게 됩니다. 17장 이후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한 야웨에 의해 사래의 옥문이 열릴 것을 계시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할례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여자는 신체적으로 직접 할례를 행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할례가 ‘처녀의 표’를 상징하는 것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22:13-14)

 본문은 할례의 세 번째 의미와 연결됩니다. 즉 할례의 피는 신혼 첫날밤에 흘리는 피와 같습니다. 결혼 첫날밤에 피를 제시하지 못하는 신부는 간음녀로 판명되어 죽음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여자는 자기가 간음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처녀의 표로 잠자리의 핏자국을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여인이 이 ‘처녀의 표’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신랑이 정말로 신부를 사랑한다면 그 신부를 위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신랑은 신부의 처녀의 표를 만들기 위해 첫날 밤에 고통스럽게 자기 육체에 할례를 행하여 그 피로 여자의 생명을 살려주게 됩니다. 이 신랑이 바로 ‘피신랑’이고 이것이 피신랑의 의미입니다. 신랑은 할례의 피로 신부를 구원하기 위한 법적인 덮개를 제공해 줍니다.


 지금 십보라는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들의 다리에 그 피를 바르고 난 다음에 그 아들에게 피신랑이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들의 할례의 피가 자기 가정을 건져내었음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모든 집이 할례를 행함으로 죄악된 자신들을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리 속죄’ 뿐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은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묘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식 날로 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로 당신의 신부의 죄악을 덮으시고 구속하십니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 신랑과 신부의 연합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모세와 그의 가족은 미리 장자 게르솜의 할례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유월절, 결혼식의 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피를 통해 어린 양의 피를 미리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 첫날 밤의 신랑의 피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악된 육체가 제거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밤에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교회가 대대로 당신의 몸에서 흘린 언약의 피를 기억하라 하십니다.(막14:22-26)

 성도여러분! 계19장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것은 할례의 피 곧 세례를 통하여 세마포 옷을 입게 된 당신의 신부와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언급합니다. 이 어린양 혼인잔치는 성찬을 말하고, 성찬은 옛 언약에서 유월절의 성취입니다.

 어린양 혼인 잔치는 여호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교제의 식사이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주일 한 덩이의 빵과 한 통의 포도주에 함께 참여함으로 한 몸을 창조하게 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10:17)

 오늘 우리는 모세의 가족이 체험한 예비적 유월절을 통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피신랑의 대속의 피를 통해 정결함을 입고 흠없는 신부로 그리스도 앞에 나왔습니다. 매 주일 우리는 나의 피신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린양 혼인잔치를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남아있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늘 죄로 더럽혀있고 오염되어 장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서로 죄용서를 구하며 서로 사랑하며 더욱 더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죄용서와 영생의 약속이 성례에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나의 피신랑이요 도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참으로 안전함을 얻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고 매 주일 피신랑의 피로 새롭게 되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야웨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을 당신께 두도록 이스라엘의 장자를 봉헌할 것을 요구하신 것을 살펴봅시다.

 야웨께서는 출13: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족마다, 모든 축사와 초장마다 맨 처음 태어난 초태생을 거룩히 구별하여 당신께 돌리라고 요구하십니다. 각각의 초태생은 야웨의 것입니다. 그래서 야웨의 능한 행위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물, 기념물로서 사용됩니다.

 성도 여러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초태생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무슨 의미를 제공해 줍니까? “바치라”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는 장자들이 하나님의 예배에 봉헌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성전봉사를 위해 구별되어야 합니다. 야웨의 명령은 각 가정의 장자들이 당신께 돌려져서 야웨의 집에서 사역해라는 것입니다. 짐승들에게 있어서도 초태생의 수컷들은 제단에서 희생제사로 드려져야 했습니다. 나귀와 같은 일부 짐승들은 부정했습니다. 부정한 짐승들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로 드려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귀의 첫 새끼는 대속하거나 목을 꺾어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나귀의 첫 새끼를 지키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 대신에 어린 양으로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그 나귀 새끼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동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야웨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능하신 손과 편 팔로 구원하셨습니다. 애굽의 초태생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초태생들은 살려주신 야웨의 이 일은 너무나 위대하고 오묘합니다. 그래서 이 일은 결코 잊쳐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 일은 대대로 기념되어야 합니다.  

 야웨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모든 것의 자연 질서를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초태생은 특별하고 독특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념물로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으로 연합하여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 첫 아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행위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물로서 하나님께 돌려져야 했습니다. 소나 양이나 다른 가축 중 한 마리가 초태생 수컷을 낳을 때마다 그 새끼는 야웨께 희생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야웨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사역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태생은 야웨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고대 문화에서 초태생, 즉 장자는 특별한 위치를 가졌습니다. 가족의 소망은 장자에게 있었습니다. 이 장자는 가족의 이름, 유산, 재산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는 열쇠를 쥐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가족의 수장의 위치를 이어받습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상속에서 있어서도 두 배의 몫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웨께서는 “장자는 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각 가정의 미래요 소망인 장자를 야웨께로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로인해 이스라엘 집마다 장자가 봉헌되었습니다. 이는 이제 각 가정의 소망이요 미래인 장자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음을 가르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는 이 장자들이 이스라엘의 소망과 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웨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소망과 미래입니다. 야웨께서는 나일강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살육한 피를 보수하시고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야웨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야웨께서는 백성들 가운데 자기 거처를 두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며 이스라엘을 번성한 민족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초태생을 바치라!’는 야웨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합당한 값으로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이 요구는 구원에 대한 값이 아니라 야웨께서 하신 일에 대한 기억, 기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성도여러분! 이 모든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장자는 정말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가족의 소망과 미래를 상징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는 모두 ‘소망’이라는 장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나타내는 의미로서의 장자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의 소망을 두는 곳,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자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장자)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소망을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두고 있습니까? 아마도 자녀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과 만족은 여러분의 자녀의 성공에 달려있습니까? 과연 자녀들이 성공했다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까? 자녀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세상은 산산이 부서집니까?

 혹은 자신의 물질적인 부(재물)에서 소망을 찾으려 합니다. 여러분은 은행계좌, 은퇴 적금, 혹은 자기 소유로 가지고 있는 주택에서 소망을 찾으십니까? 경제가 불황일 때, 주식시장이 폭낙할 때, 여러분은 불안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무엇에 근거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에서 삶의 만족을 발견합니까?

 야웨께서 우리의 장자를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심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야웨께서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미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당신께 투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고 내일 일을 걱정할 때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과 같습니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야웨는 우리의 구속주이십니다. 우리는 삶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출 32장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죄로 인해 야웨의 계획을 가로막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범죄하여 더럽혀졌습니다. 그 때 레위인들이 일어났습니다. 레위인들은 모세의 편에 서서 백성들이 회개하고 다시 모세에게로 돌아오도록 도왔습니다. 야웨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레위인들은 진영을 가로질러 통과하면서 금송아지를 경배한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가 오늘 야웨께 구별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시점부터 레위인들이 장자들을 대신하여 성전 사역을 위해 성별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장자가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명령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이 명령은 성경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출22:29-30, 34:19-20; 레27:26-27; 민3:11-13, 8:16-19; 신 15:19 등) 그 중 민수기 3:12-13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제 장자들을 대신하여 레위인들이 섬김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자들이 성전 사역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는 대신에 구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레위인들이 각 집의 장자들을 대신하여 섬길 수 있도록 부모들은 은 다섯 세겔의 댓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민수기 18:15,16절,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부정한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대속할 것이며 그 사람을 속할 때에는 난지 일개월 이후에 네가 정한대로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속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눅 2:22-23절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모든 장자는 야웨께 바쳐져야 한다는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갈 4:4-5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율법에 따라 예수님은 야웨께 봉헌되었습니다. 맏아들로서 예수님은 거룩하게 구별되고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바쳐졌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을 대속하기 위해서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하였으므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께서 대속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는 야웨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제사장적 봉사의 일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 땅의 종살이로부터가 아니라 죄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구속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벧전 1:18-19절입니다.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야웨께서 애굽에 내리신 재앙들을 기억하십니까? 야웨께서 어떻게 강한 손과 편 팔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까? 강력한 구속 사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과 구주로 인정하며 신뢰합니다. 그런 감사로 인해 그들은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계속 배워나갑니다. 여러분!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제물로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들을 믿는 자, 아들의 생명에 참여한 자는 존재가 바꼈습니다. 땅에서 내가 어떤 형편에 놓여있던지, 그 상태는 나의 존재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현실의 극심한 고통이 주의 구원을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나를 위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미래와 소망이 주 당신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여 잊지 않도록 기념물로 장자를 주께 바치게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구주 하나님을 알도록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합시다. 참된 지식은 참 신뢰로 우리를 견인하며 하나님께 헌신하게 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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