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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1-15 (일)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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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5일 주일 오전 말씀
욥의 위로자들
2017년 1월 15일 주일 오전 말씀
성경읽기 : 욥4:1-17,8:1-10, 11:1-6
설교본문 : 욥2:11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욥3장에서 욥은 극한 외로움에 빠져, 가슴이 터질 듯한 탄식을 쏟아냅니다. 욥은 철저히 혼자이고, 희망이 전혀 없으며 노히려 창조 질서가 역행하기를 원합니다. 다시말해 빛이 어둠으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생명이 죽음으로 해체되길 바랍니다. 3장은 우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전을 울리는 처절한 질문으로 끝납니다. 온전한 성도가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고 건강마저 잃은 뒤, “어찌하여”라고 외칩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역설적이게도 엽의 “위로자”라 불립니다. 이들은 한 주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이 탄식하자(3장), 말을 많이 합니다. 이들은 거의 3회에 걸쳐 열띤 논쟁을 벌이며 성경 아홉 장에 걸쳐 말합니다.
세 친구는 서로 상대방의 말을 흉내 내지 않으며, 세 차례 논쟁이 진행되면서 이들의 연설도 발전합니다. 그러나 세 친구는 대체로 비슷한 방식으로 똑같은 말을 하며 오류를 내보입니다.

오늘은 전체적인 세 친구들의 신학체계와 논조와 그들이 빠뜨리고 있는 부분(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욥의 위로자들”입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는 교훈을 잘 배우며 믿음위에 견고히 섭시다.

위로자들은 욥에게 감동하지 않았다.

8:2에서 빌닷은 욥의 말에 대해 발끈합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엘리바스도 15:2,3에서 거의 똑같이 말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외양에 슬퍼했으며(2:12), 욥이 한 말에 화를 냅니다. 왜? 논쟁이 계속 되면서 욥이 자신은 하나님께 이런 대우를 받아 마땅할 만큼 양심에 꺼리기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격노합니다.(마치 하나님의 의를 그들이 수호하는 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11:2-6에서 소발은 하나님이 개입해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욥이 입을 다물  테고, 욥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였는지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그러나 소발은 하나님이 실제로 이렇게 하시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나아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어떨지(42:7)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실증입니다.) 논쟁이 계속되면서, 친구들은 욥의 말에 완전히 신물이 납니다. 위로자들은 욥이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듣길 바랍니다.

욥은 위로자들에게 감동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욥에게 감동하지 dskg은 것과 마찬가지로 욥도 친구들에게 크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서로 반감과 불신을 느깁니다. 욥은 어쩌면 친구들에게 위로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몹시 목이 마른 여행자가 갈증을 풀려고 달려가 보았으나 먼지처럼 바짝 마른 강바닥 같았습니다.(6:14-30) 욥의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구나”라고 말하며(16:2), 다시 16:3에서 친구들의 허망한 말이 멈추길(입이 다물길) 바랍니다. 또 욥은 12:2에서 신랄한 풍자를 들어 말합니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날카롭고 예리한 풍자는 26:2이하에서도 계속됩니다. 이런 풍자는 친구들의 오류와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친구들이 욥을 “괴롭히며 말로 그를 짓부수기”(19:2)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욥의 위로자들에게 감동하지 않으신다.

4-27장(24장)에 걸쳐, 욥과 세 친구들은 격론을 벌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화를 내는ㄴ 것이 마땅합니까? 욥이 하나님의 처서가 부당하다고 했으니, 친구들이 욥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마당합니까? 아님 친구들이 욥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으니, 욥이 친구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이것을 알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욥기 말미에, 하나님은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42:7)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욥의 친구(위로자)에게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친구들을 향한 욥의 분노는 이들을 향해 타오르는 하나님의 분노의 메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자들이 9장에 걸쳐서 하는 말을 읽을 때, 대체로 쓸데없는 소리라고 잃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말이 전부 잘못된 말(쓸모없는)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욥의 위로자들이 한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살펴보면 친구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거짓 가르침을 닮았습니다. 여러분, 거짓 가르침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거의 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엽의 친구들이 어디서 틀렸는지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친구들의 신학 체계
세 친구들의 밑바탕에 깔린 신학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1.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통치하신다.
2.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공정하시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악인에게 벌을 내리시고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 언제나(이생에서 곧바로, 확실하게)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이 달리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데, 이것은 생각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내가 고난을 당한다면, 내가 죄를 지었고 내 죄 대문에 공의롭게 벌을 받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추측컨대, 내가 복을 받았다면, 나는 선함이 틀림없다...)

성도여러분! 욥의 친구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에 이런 노리가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4:7) 엘리바스가 한 말은 이런 뜻입니다.“알다시피, 무죄한 자가 망한다면 세상은 불공정할 걸세. 그러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네.” 다시 5:17-26에서,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욥, 자네의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일세. 자네는 죄를 지었네. 그런데 하나님이 자네를 사랑하셔서 징계하시는 걸세. 그러니 하나님의 징계에서 배우게.”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신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잠3:11,12; 이것이 히12:4-13에 인용된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당하는 까닭은 죄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욥이 죄를 지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논리입니다.(그러나 욥의 고난이 그 이유가 아니기에 그의 논증은 잘못되었습니다.)

8:4-7에서 감정이 고조되는데, 빌닷은 자신들의 체계에서 또 하나 결론을 끌어냅니다. “욥, 자네 자식들이 죽었네. 그렇지 않은가? 그건 게네들이 틀림없이 죄를 지었다는 뜻이네.” 그는 나아가 욥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회개하면, 아직은 하나님께서 자네를 회복시켜 주실 걸세.” 이것 또한 친구들의 사고체계로 보면 모두 맞는 말입니다.

소발이 한발 더 나아가 욥에게 한 말을 보면 친구들이 욥에게 느끼는 불편함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1:6 새번역) 사실 소발이 한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욥, 하나님이 자네 죄 가운데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기까지 하셨네. 아마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자식들처럼 자네도 이미 죽었을 걸세.” 소발은 욥이 무죄를 주장하는데 진저리를 냅니다. “하나님이 아직 자네의 모든 죄를 다 벌하지 않으신 걸 다행으로 알게!” 빌닷이 8:4-7에서 했듯이, 소발은 11:13-19에서 자신들의 추론을 토대로 욥에게 도 다시 회개를 촉구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공의롭고 공정하지 않으시다면 우주의 도덕체계가 무너진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18:3-5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빌닷은 욥이 자신들을 “어리석게”(짐승으로)본다고 불평합니다. 욥은 크게 화를 내지만,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도덕 질서와 우주의 틀이 한 사람의 변덕에 맞추려고 재배열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기 작이 없다. “욥, 자네를 위해 우주적인 예외가 만들어지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네. ‘악인의; 빛은 꺼진다’는 것은 절대적인 법칙일세.(18:5) 그러니 자네가 고난당하고 있다면 자네가 악한 게 틀림없네.” 욥의 위로자(친구)들의 논리는 이런 항상 이런 식입니다. 당연히 욥은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회개하길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욥의 양심은 깨끗합니다.

그래서 22:5-9에서 엘리바스는 더 참지 못하고 욥이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합니다. “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22:5) 욥, 자네는 부자일세. 그런ㅁ데 그것이 자네가 정직하게, 정의롭게 일해 부자가 되었다고 우리가 믿어 주길 기대하지 말게. 친구 자네는 위선자일세. 자 이제 자네의 위선을 실토하게. 또 다시 22:21-22에 욥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여러분! 이 말은 복음을 제시하는 매력적인 표현입니다. 이 본문을 문맥에서 떼어내 종종 상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엉뚱한 사람에게 내뱉은 지극히 부적절한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위로자로 온 욥의 친구들의 시각입니다. 이 체계의 양면이 인간의 영혼 깊이 자리합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 내가 착한 일을 한 것이 틀림없어!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무언가 끔직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지난 과거의 어느 시점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어. 이런 인식이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신학 체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체계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적어도 첫째와 둘째는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통치하시며, 그분의 통치는 정의롭고 공정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다양하게 고통당하고 있거나 당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32편에서 시인은 자신이 죄를 숨겼을 때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무게에 몸이 쇠해졌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켰을 때에야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은 옳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욥기 1,2장에서 세 차례나 ‘온전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욥이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게 아니므로. 고난을 부르는 그 어떤 죄도 고백할 필요가 없음을 압니다. 그런점에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욥이 겪는 슬픔에 잔혹하게 짐을 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무려 9장에 걸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자들의 논조

위로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첫 연설을 끝내면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다.”고 말합니다.(5:27) 욥의 친구들의 확신의 근거에는 자신들이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8:8-10) 다시 엘리바스는 15:7-10에서 나이를 내세우며 욥을 누르려 합니다.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9) “우리는 너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다.”(10)
욥의 친구들은 정직하지 못하며, 진실로 욥을 공감하려고 하지 않으며, 나아가 욥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논리를 제시할 뿐 환란당한 욥을 진실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전혀 욥의 항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말이 욥의 친구들에 대한 해설일지 모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위로자들이 믿지 않는 것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한 말이 대부분 옳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문제는 친구들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거짓 가르침이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지 않고 빠뜨리는 것이 무엇이나? 하는 것입니다.) 위로자들은 중요한 세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사단이 없다
위로자들의 사고에는 사단이 없습니다. 욥1,2자이 보여주듯 사단은 실재하며 영향력 있는 영적 인격체입니다. 욥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진 영적 논쟁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위로자들의 사고에는 사단이나 영적 전투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욥의 고백에는 이런 인식들이 반영되고 있으나(3:8의 리워야단, 26:12下 뱀을 닮은 라합을 언급) 이들의 세계에서, 악은 순전히 인간적 현상입니다. 전혀 영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적 세계관이 아닙니다.

기다림(인내)이 없다.

위로자들에게 심판은 지금입니다. 악인은 지금 벌을 받습니다. 의인은 지금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에 대한 약속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에는 선을 투입하며 복이 쏟아지고, 악을 투입하며 독이 쏟아진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결과가 결정되어 있는 고정된 규칙으로 인식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네 삶에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이 말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갈6:7) 역사의 최종적 시점에 확실하게 진리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이것이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살며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위한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친구들이 말한 것처럼 ‘인과응보’를 믿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즉각적인 인과응보일 것이라 믿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언젠가 세상이 창조때처럼 질서를 회복할 테지만 우리가 사는 현재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에 따른 축복과 배교에 따른 저주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잠3:1,2절에 “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그러나 욥에게는 평강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일반적 진리와 “모든 경우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진 등의 재해나, 일상생활 중 예고없이 발생하는 사간 사고에 선인과 신자들을 늘 비겨가지 않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고 창조 질서를 따라 살면 평안과 번영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의가 최종 승리한다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야 드러날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다.

성경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욥의 세 친구들이 범한 가장 큰 오류와 누락은 ‘무고한 고난을 위한 자리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의인이 고난당하거나 망하면 도덕적 풍경에 오점이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바스가 묻듯이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성경은 이 질문 앞에 크고 영원한 십자가 제시합니다.

우리를 마침내 망하지 않게 하려고, 죄없는 자가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망했습니다.(죽었다) 깊은 의미에서 욥이 당한 고난은 은혜의 비용입니다. 욥이 예표하는 고난은 은혜의 비용입니다. 모든 성경은 “ 너(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딤후3:15) 그런 면에서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을 살피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려하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도하려 하시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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