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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4-06-02 (일)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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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자녀의 특출함
지혜의 자녀의 특출함
2024년 6월 2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 읽기 : 눅7:35-50, 창 41:38-4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본문 35절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은 마치 지혜문서의 ‘지혜’처럼 다루어져 본문의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되는 우를 봅니다. 그러나 35절은 29-50절의 긴 단락에서 29~34절까지의 내용의 결론임과 동시에 36-50절 말씀의 서론이기도 합니다. 이 위치에 두고 본문을 석의할 때 비로소 ‘지혜’와 “지혜의 자녀‘에 대하여 바른 해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지혜의 자녀의 올바른 행실을 통해 주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게 하자”는 주제로 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듣는 마음을 주셔서 이미 은혜로 주신 믿음을 잘 사용하여 의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지혜’와 ‘지혜의 자녀’가 무엇(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지혜와 그 자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전령으로 온 세례 요한에 대하여 사람들은 두 가지의 반응을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는 자와 받지 않는 자로 구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로 구분됨을 말합니다. 그 결과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롭다(옳다)하는 반면에,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거절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구도에서 보면 지혜의 자녀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옳다(의롭다)고 하는 29절의 ‘모든 백성과 세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식의 표현을 하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또 지혜의 자녀는 31-34에 나오는 장터에 노는 아이들로 비유된 ‘이 세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의 특성을 본문이 한마디로 말하길, 장례식의 슬픈 곡조에도 반응이 없고 결혼식의 피리소리에도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구속경륜에 비추어 말하면, 이 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자인 세례 요한도 무시하고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무시합니다. 그러나 반면 지혜의 자녀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영접하고 순종합니다. 따라서 문맥상 35절의 지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다시 정리하면, 지혜는 예수님이요, 그 자녀는 믿는 신자입니다. 눅11:49下에서도 지혜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합니다. 또 고전1:24-30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잠언 8장과 9장은 지혜가 인격체로서 창조주이심을 말합니다. 거기서는 창세전부터 계시는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나 영광의 자녀라고 하지 아니하고 왜 지혜의 자녀라고 합니까?

 35절 앞의 구절은 지혜이신 예수님께 반응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율법사와 당시의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론으로 나오는 35절이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사인 ‘그러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이 사용될 것 같은데 본문은 ‘그리고(and)'를 사용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신앙(믿음)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지혜는 바로 앞의 이 세대의 무관심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그리고’를 사용함으로 이 자체가 지혜와 그 자녀의 지혜로움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사용하고 있는 묘사방법에 주의하여 봅시다. 지혜와 그 자녀는 문맥상으로 본다면 이 세대 사람들과 마땅히 충돌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충돌할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대적하지 않는 것이 곧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대의 사람들의 논리에 따라가지도, 휩쓸려가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는다고 본문은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의롭다) 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지혜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혜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주님이 옳으며, 도 복음이 의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지혜’이신 예수님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혜의 자녀’의 특출함에 포커스를 두고 있습니다. 지혜의 자녀가 누구냐?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나로 인하여 옳다함을 받게 되어 있음을 굳게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찾아내어 그 책임을 다하도록 죽도록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지혜의 자녀의 올바른 행실의 본보기로 식사 중에 예수께 나아온 한 여인을 제시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과 무척 대조적입니다. 원래 이 여인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극진한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았음을 알고서는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48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마치 이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묘사합니다. 47절, “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것은 마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죄용서의 근거요, 구원의 바탕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좀 더 주의해 살펴보면 그런 오해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죄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은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그 근거로 첫째,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서 죄용서가 먼저이고 그 결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됨을 말합니다. 둘째로, 빚을 탕감받은 두 사람의 비유도 이 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이 비유에서도 탕감이 먼저이고, 그 결과로 사랑이 두 번째로 뒤 따르고 있습니다. 셋째로 원문을 보면 37절에 과거에 ‘죄인이었던’(NASB)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타나는 그 시점에는 이미 죄인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47절에 죄가 ‘사하여졌도다’는 말이 ‘신적수동태’로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예수님 앞에 이 여인이 나오는 순간에는 이미 그의 죄가 용서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것을 원어의 의미를 살려 번역한다면, “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그러므로 그녀는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요약하자면 본문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한 것이 근거가 되어 이 여인이 죄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기독교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신자들은 사죄의 은총을 받아 지혜의 자녀가 된 것을 믿고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부활의 자녀, 지혜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혜이신 주님께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실을 통해 주님께서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증거되는 지혜의 자녀는 누구입니까?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진전한 회개와 깊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또 자기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이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당시의 풍습상 여인이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여인은 수취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님을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주님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표했습니다. 옥합에 담긴 향유는 주님께 드리는 고귀한 예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여인의 사랑의 섬김에 대해 바리새인 시몬은 무엇이라 평가하며 판단하고 있습니까? 시몬은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시몬은 여자와 이 여자의 행위를 용납하고 있는 예수님 둘 다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닫아버립니다. “이 예수는 확실히 선지자가 아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사랑과 헌신과 감사의 선물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것을 하셨는데, 그것은 이 여인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의 사랑의 이유를 시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빚을 탕감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빚(죄용서)을 갚음에 전혀 무능력한 자를 은혜롭게 탕감해 주시는 주인과 그 주인의 호의에 대하여 감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하신 후 시몬에게 묻습니다.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여러분, 이 여인의 행동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주님께 향유를 붓는 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마26:12, 요12:7) 그러나 누가복음은 예수께 대한 그런 계시적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여인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가 자기 자신의 변화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 얻은 것에 감격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사랑과 헌신은 억만 죄악 가운데 구원받은 우리 각자 모두에게 강렬한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우리 또한 이런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담아내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써만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요 극진한 헌신의 삶으로 표출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삼위하나님과의 언약안에 자신을 두는 것이요 언약적 삶에 자신을 교회와 함께 묶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호의가 ‘지혜’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 고백의 표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우리를, 먼저 이 고백을 통해 주께 접붙여져 있는 교회와 자신을 묶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강력한 표와 인이 되어 항상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지혜의 자녀의 올바른 행실을 요구합니다. 지혜의 자녀의 특출함을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마치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죄사함 받은 성도에게 혼신을 다하는 사랑과 헌신과 섬김이 있어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희생적인 삶이 없는 사람은 지혜의 자녀가 아닙니다. 복음을 위한 구체적 고난이 없는 사람은 지혜의 자녀가 아닙니다.

 창세기 41장 37절 이하에 바로가 요셉을 대면하고 말하길,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여러분! 어쩌면 가장 아름다워야 할 인생의 전반기를 형들의 미움과 자기 욕망을 채우지 못한 자의 시기와 은혜를 잊어버린 자들에 에워싸여 연거푸 역경에 처한 불운한 요셉이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대하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권력을 요셉에게 위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심지어는 천하를 호령하던 애굽의 왕 바로가 요셉에게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보좌뿐이다!”라고 하면서, 요셉을 극진히 대우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왜 요셉은 어느 곳에서든 땅의 권력자들, 세상의 권세자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고, 그 권세자들은 요셉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것일까요? 왜 이런 일이 요셉이 가는 곳마다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41장에서 이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연거푸 꾼 두 개의 꿈 이야기에서 세상의 권력자도 지혜자도 그 누구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의 권세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 전국을 다스리며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맡깁니다. 죄수복을 입었던 감옥 안의 통치자였던 요셉이 이제 새로운 직분을 얻게 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길,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요셉은 바로의 조언자, 즉 바로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권력자를 좋아하고 그래서 그들의 기분을 맞춰 주며 아첨합니다. 이는 이익을 얻고자 함이고, 적어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유력한 사람이 교회의 교인이 되면 자랑합니다. 이유는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 것’이 ‘교회에서도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꿈’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꿈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방편’이라는 점에서, 세상이 가진 권세는 아무리 크고 강대하다고 해도 전혀 무력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한, 작은 노예 청년 한 사람은 이것을 알고 방비할 수 있지만, 전 세계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힘과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계시를 사용하여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힘은 계시를 아는 지식과 명철입니다.

 창세기 39장 이후부터의 ‘요셉에게 집중되는 권력’이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께서 요셉이라는 자연인을 이 세상에서 잘 되고, 형통하게 하는 것을 보여줌에 있지 않습니다. 자연인 요셉이 승승장구하여 자기 윗사람들에게 인정받아 권력자가 되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꿈꾸는 자가 되어 “요셉처럼 성공하자”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권력을 이양받아 통치하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세상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 세상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힘과 능력은, 전옥이나 보디발이나 바로 왕과 같은 세상 권력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왜 진정한 권세자이신 하나님은 보지 않고, 세상의 힘들만 보고 있느냐? 너희는 왜 보이지 않는 손은 주목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손만 두려워 떠느냐?”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셨던 예수님의 그림자로써 요셉은 바로에게 새 포도주와 새 떡을 주는데, 이것이 온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입니다. 교회는 산 위의 동네로 복음의 진리를 비추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먹을 수 없는 더 좋은 떡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각을 바꾸십시오. 믿음의 눈을 뜨시고 영원한 왕국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세상에 침잠해있는 아둔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땅의 것을 사용하되 세상에 매몰되지 말고 하늘의 것들을 구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주께서 요셉을 통해 보여주시고 있는 교훈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셨던 예수님의 그림자로써 요셉은 바로에게 새 포도주와 새 떡을 주는데, 이것이 온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입니다. 교회는 산 위의 동네로 복음의 진리를 비추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먹을 수 없는 더 좋은 떡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계시의 수종자로서 이 세상이라는 소명의 공간에서 진짜 권세를 가진 자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시는가?’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세상에 하나님의 지혜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믿고 회개하는 심령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공동체의 한 지체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우리는 전에 죄인이었으나 이제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죄용서함을 입은 ‘지혜의 자녀’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죄 받아 ‘지혜의 자녀’된 여러분은 지혜이신 주님만이 옳다! 의롭다! 함을 얻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 때문에 “과연 하나님은 옳구나!”하는 말이 나오게 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 때문에 “과연 기독교는 맞구나!”라는 말이 고백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 때문에 “우리 교회가 의롭구나!”하는 말이 인식되어져야 하겠습니다.

 지혜이신 우리 주님과 그 나라는 주님의 자녀된 우리들로 인해 옳다함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로 인하여 주의 의로우심이 높이 드러나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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