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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3-11-19 (일)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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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가?
2023년 11월 19일 주일 오전 설교 말씀
성경 봉독 : 신1:34-4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꼭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의 요건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신명기에서 유독 더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인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지난 몇 주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믿음 없음, 즉 불신앙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다른 측면에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요지는 “ 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확실성을 확인함으로 믿음의 확고함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35절을 보십시오.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5절은 결과론입니다. 결국 이들이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장면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을 바라봄으로서 그 땅을 악평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비웃은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에게 이 땅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더해 이들을 이 광야에서 모두 죽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선언을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대단한 진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결과론인 35절 말씀의 앞 절인 34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하사 맹세하시다”라는 표현은 1) 대단한 진노와 2) 언약의 파괴,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첫째, “노하사”라는 말씀은 통상적인 화남이 아니라 “격노”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통상적으로 화가 조금 날 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진노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진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노하신 그 진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불을 드림으로써 축제인 성막봉헌식을 장례식으로 바꿔놓은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실 때의 하나님의 진노이며, 고라와 그 일당들의 반역에 대해 죽음이라는 심판을 내리실 때의 그 진노입니다.

 성경에서 이 진노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을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할 때 격노하십니다. 특히 그 언약을 비웃는 행동을 할 때 격노하십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진노하는 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적어도 신이라면 사람들에게 무조건 호의적이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고 한다면, 그 배우자가 아무 남자하고나, 아무 여자하고나 동침하고 성적 방탕을 일삼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격노하지 않고 점잖게, 마음이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이 그럴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천만분의 일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배우자를 향한 갈망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독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54장 5-6절 말씀입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장 14-15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왜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에게 격노하십니까?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남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에 대해 화를 내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결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가 결혼식을 할 때,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이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언약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겠다고,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만을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맹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태는 단순한 불평을 넘어 언약 자체를 비웃습니다. 출애굽을 비웃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목적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언약의 배반입니다. 남편되신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도 언약의 배반에 대해 언약용어로 말씀하십니다.

 “노하사 맹세하여”의 단어에서 ‘노하사’도 언약용어이지만 “맹세하여”는 더욱 언약의 용어입니다. “맹세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약속하다”, “언약하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말은 “맹세로서 자신을 묶다”라는 의미입니다. 언약에 묶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지키겠다. 그것이 “맹세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맹세를 아브라함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26:3-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 내용이 정반대의 입장에서의 맹세를 하십니다. 원래 하나님의 맹세는 “내가 맹세코 너희에게 이 가나안 땅을 주겠다”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맹세는 “내가 맹세코 너희에게 이 가나안 땅을 주지 않겠다”는 맹세입니다. 둘 다 똑같이 언약용어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고 계시고, 저들에게 허락하셨던 약속의 땅을 취소하려 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단순히 화난 것으로 표현하셨다면 우리는 덜 무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언약용어로 표현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는 더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와 언약관계를 청산하겠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노하사”와 “맹세하여”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주의 백성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를 잘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는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는 실수가 많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아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혹 실수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은 “징벌을 위해 찾아오시는 무시무시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죄를 이해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버지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그 언약 관계 안에서 빗나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러서 회초리를 때릴 때의 아버지의 태도와, 언약을 저버림으로 인해 관계를 파하려고 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들이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아픈 매를 대시기도 하십니다마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그것은 우리에게 약이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 관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간의 부족함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 자체를 의심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참된 성도의 길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가끔 멀어지거나 죄를 더 지을 수도 있습니다만, 항상 언약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언약 바깥으로 나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도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그 사실을 발견하고는 얼른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지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실수와 죄 가운데 삽니다. 하지만, 절대 궁극적인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가끔 일탈하여 죄를 지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단계로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죄를 상시적으로 지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약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즉시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하여 분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에 있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땅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하시는 단계에까지 이릅니다. 비참하고 참혹한 현실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부터 왔습니까? 그것이 3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맹세가 초래케 된 원인을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믿음 없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요건” 곧, “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많은 요소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성경은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까닭, 을 “믿음 없음”에다가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명기 본문 자체가 이 패스포트를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패스포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요건은 바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너희는 약속의 땅을 결코 볼 수 없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신약이 무엇이라 설명하고 있는지 살피며 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에는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 부분을 잘 상고한다면, 구약에 모형적으로 주어졌던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 신약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히3: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브리서 3장 7-8절에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인용하여 성도들에게 “너희들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노하심을 격동케 말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반역 상황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히브리서에서는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19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히브리서의 결론도 신명기와 같이 저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신명기에서 말하였듯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언약 성취의 관점에서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분명 3장의 내용에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4장에서는 어떤 단어들로 바꾸어 말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먼저 1절입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분명! 이제까지 히브리서 말씀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장에 들어가니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안식에 들어간다”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서는 신약성도인 우리와 구약성도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선상에 놓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다!” 즉, 구약성도인 저들과 신약성도인 우리가 다 “같은 복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 말씀을 듣고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는 2절의 하반부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하지만 우리는 믿으므로!” 라고 하면서 그 결과로 “안식에 들어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히브리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에 들어가는 것”, “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구약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참된 본체의 “모형”으로서 “땅 가나안”을 받았습니다. 이 약속의 땅을 받은 것이 모형이라면 그 실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백성은 ‘믿음’을 통해 약속의 땅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신약 백성은 ‘믿음’을 통하여 그 땅의 본질인 ‘안식’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심으로서 “안식의 모형”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약속의 땅의 성취인 참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무엇을 통하여 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히브리서는 이후 문맥에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쟁취하므로 일차적으로 안식을 성취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또 다른 안식이 남아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안식이 14절-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구약의 “약속의 땅”은 안식의 모형이며, “약속의 땅을 얻는 것”은 안식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을 이룬 것이 누구를 통해서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쟁취하는 것을 통하여 안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구약 백성들에게 모형으로만 존재했던 참 안식을 이제 ‘실제로’ 받습니다. 죄로 인하여 고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참된 위로와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까? “참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내어 그들의 보고를 듣고 난 뒤 보인 행동으로 인해 빚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들에게 진노하시고 언약을 파괴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2)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믿음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안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이 참된 안식의 구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사실을 체계적으로 모두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언약 안에 거하면서 언약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쉼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를 얻기 위하여 “믿음 없는 자들”이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날마다의 일상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고 확신에 이르게 되길 바랍니다. 눈앞에 아무리 곤고한 현실이 놓여 있을지라도 참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의 위로와 쉼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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