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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3-11-12 (일)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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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도와 사람의 의도
하나님의 의도와 사람의 의도
2023년 11월 12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봉독 : 신 1:19-33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건너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자신들의 코앞에 가나안 땅을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불신앙이 아니었다면 곧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낼 것”을 제안했습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22절).

 자신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을 미리 탐지하자는 의견은 그 자체로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 민수기 13장을 보면 이를 말한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민13:1-2).

 오늘 본문에서도 모세는 정탐꾼을 보내는 것에 대해 23절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라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말하고 있는 “선히 여겨”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맞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정탐꾼을 보내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내자고 하는 이들의 의견을 좋은 것으로 여기셨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정탐을 보내어 약속의 땅을 미리 탐지하는 것을 선히 여기시는 것은 두 가지 의도가 있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첫째는 그 땅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 말로만 들었던 그 땅에 들어가 보면서 “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땅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즉, 이들은 약속의 땅의 부요함을 미리 맛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견고한 믿음만 있었다면 얼른 가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 가자! 우리가 가서 보니 과연 이 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땅을 주신다니! 너무 기쁘고 감사하지 않는가!” 사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정탐으로 보내신 이유는 “좋은 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아름다움을 그들이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도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애굽의 악한 풍습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시내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시내산에서 호렙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많은 불평을 하고 언약 백성으로서 부족한 모습을 이미 많이 보여 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시험해 보셔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과연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과연 말뿐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언약 백성의 풍모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을 시험해 보려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쉽게 시험이 되는 이유는 그 땅이 빈 땅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땅은 이미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장대한 족속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그 성곽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도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들은 “긴 목을 가진 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들로 전통적으로 거인족으로 알려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빈 땅을 주시지 않고 이미 다른 족속이, 그것도 매우 강하고 패권적인 족속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을 주셨을까요?

 이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품격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할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아무리 현실적인 어려움이 들이닥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강대한 족속이 있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사람의 의도

 이런 상황을 잘 숙고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도가 몹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 즉 하나님께서 주실 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보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2)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쟁취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실로 필요한 것은 ‘믿음’ 곧, 그들이 환경적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되더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가 철저히 “신앙적”인 이유임을 알려줍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낼 때의 목적은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정탐꾼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즉,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보아야만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가 과연 이길 만한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정탐꾼을 보낸 이유는 가늠질을 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것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확인’하고 ‘확신’만 얻으면 됩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신앙에 ‘확신’도 필요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드온을 들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을 때 양털 뭉치에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는 요구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향하여 분을 내시지 않은 이유는 기드온의 요구가 악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양털에 이슬이 내릴지 안 내릴지 하나님과 내기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으나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인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십니다. 이는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는 것은 약속에 대한 확인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지” 전력을 파악하러 간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의 거주민들에 대한 보고를 들은 뒤 그들이 곧바로 절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이야말로 참으로 세속적인 생각입니다. 불신자들이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하나님 없이 해결하기 위하여 속으로 계산하고 가늠해 보는 것과 똑같은 방식입니다.

 사울 왕을 세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명기에 이미 “나중에 너희들 중에 왕이 서거든...”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구속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나타내야만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반드시 왕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려고 하셨을 때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이스라엘에 드러내시려는 의도셨습니다. 하지만 왕을 세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는 매우 세속적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다릅니다. 이들이 얼마나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왕을 세우려 했는지를 보십시오.

 삼상8: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러자 사무엘이 하나님께 여쭙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왕 제도의 악함을 말하며 권면합니다.

 “너희를 다스를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도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마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하지만, 이 말을 다 들은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나이다”

 이 내용을 보면 역시 여기서도 하나님/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무엘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냐!”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합니다.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열방들처럼 세속국가들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겠습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전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있는 전망이 다릅니다. 분명 두 편 다 왕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은 현실적인 필요만 말합니다.

 똑같은 일들이 오늘 본문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편 다 “정탐꾼을 보낸다”는 현실에 서 있지만, 하나님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적인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정탐꾼을 보낼 때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동상이몽, 즉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보고 왔을 때의 반응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정반대의 측면에서 그 반응이 너무나 당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 하셨기 때문에 이 내용에 대해 언약백성이라면 추호의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반응은 당연히 둘러보고 난 후의 확신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땅을 보고 온 정탐꾼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당연한 반응을 보입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란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상대입니다. 유목민들이 농경문화의 전투민족을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자들의 반응입니다. 세상의 방식, 세상의 사고관, 철저한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에 의해, 증거와 확인에 의해 결정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매우 이성적이고 무모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편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인간의 한계 안에서 볼 때 합리적인” 방식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신앙의 영역 안에서는 “합리주의=불신앙”이라는 도식이 정확하게 성립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밑도 끝도 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신비주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질서를 따라 신앙 안에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합리주의입니다. 하지만, 세속적 합리주의는 이것과 다릅니다. 합리주의는 곧바로 불신앙을 초래하고 불신앙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합리주의는 반드시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불가능한 일을 행하라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세속적 합리주의”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속적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가나안 땅 정탐 보고와 회중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26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반응을 몇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26절 : 먼저 이들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였습니다.
27절 :
 1) 그들은 장막 중에서 원망하였습니다. ‘장막’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에서는 보통의 ‘텐트’를 가리키기 때문에 그냥 자신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였다고도 읽을 수 있지만,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성막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거룩한 곳 안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됩니다.

 2) 그들의 합리주의로 말미암아 빚어진 악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에 있게 하신 의도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27절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을 미워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셔서 그리로 보냈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응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보여주시고,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건 우리를 다 죽이려는 수작이다”라고 말입니다.

 불행히도, 여기에서 “미워하여”(히. 샤네)라는 말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약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는 기술적인 용어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단어는 “택함 받지 않은 자들” 즉 “불신자들”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들의 악은 단순히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데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로 인한 악은 “하나님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사고방식”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전체를 송두리째 저버리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로 불러오셨다!” 처참한 악의 끝입니다.

 3) 그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까지 비웃습니다. “우리를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 자체를 비웃는 짓입니다. 이 불경건한 자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 말하길, “출애굽은 하나님의 구속이 아니었다!”, “출애굽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계략일 뿐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신 역사에 대한 칭송”이 나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사역의 절정이며,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 가운데 행하신 가장 강력하고도 놀라운 기적적 역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속 역사 어느 것에서도 칭찬과 경의를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향하여서는 온갖 칭송을 아끼지 않으시며, 중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에서는 언약백성들에게 “이 출애굽을 기억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레26:45]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신26:8-9]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삿6:8-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왕상8:51] 저희는 주께서 철 풀무 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주의 산업이 됨이니이다

[왕상8:53] 주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주의 종 모세로 말씀하심같이 주께서 세상 만민 가운데서 저희를 구별하여 주의 산업을 삼으셨나이다

[대상17:21-22]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크고 두려운 일로 인하여 이름을 얻으시고 애굽에서 구속하신 자기 백성 앞에서 열국을 쫓아내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로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구속사역의 절정”으로 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패역한 이스라엘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사람이셨다면 화가 나고 분통이 치밀어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사 당신의 장자 삼으신 이스라엘이 행하고 있는 작태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절정인 십자가를 이렇듯 귀중하게 여기십니까?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9절부터 나오는 모세의 대답은 이러한 백성들의 불신실함과 반역에 대한 간곡한 탄식입니다. 이것은 사실 모세를 통해 행해지긴 했지만,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탄식하십니까? “나는 너희를 사랑했기 때문에 애굽으로부터 나오게 했다”라고 말씀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아들들아!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은 너희를 미워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아들들아! 사람이 아들을 안음과 같이 내가 이제껏 너희를 행로 중에, 광야의 무서움 가운데 인도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곳까지 도달한 것을 보아 알지 못하겠느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저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애굽에서 싸우신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한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3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행할 길을 지시하시고, 저들에게 장막칠 곳을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으로서의 출애굽은 그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의 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저를 사랑하십니까! 내 삶은 왜 이리 풀리지 않고 어렵기만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제게 더 특별한 무언가를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속한 것을 보지 않느냐?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독자를 보내어 너를 구속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이보다 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치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나의 구속을 바라보아라.”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에 결박당하며 점점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신앙의 야성을 회복합시다. 현실의 눈보다 여가 전체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을 키웁시다. 그래서 그 언약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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