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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2-09-18 (일)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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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소망, 그리고 사랑의 수고
의의 소망, 그리고 사랑의 수고
2022년 9월 18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봉독 : 갈5:1-6
설교본문 : 갈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압축해 보라면, ‘바른 믿음’과 ‘올바른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이면서 향후 나타나 보여질 것의 토대’입니다. 올바른 삶이란 ‘이 믿음이 외형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적 문제는 첫 번째가 잘못되어 있거나, 두 번째가 없는 경우입니다. 어떤 이는 바르지 못한 것을 믿어 보이지 않는 것에 문제를 갖고 있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믿음이 바르게 보임에도 보이는 삶을 갖고 있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신자 됨’을 여러분은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신자라는 것은 ‘바른 것을 믿고’, ‘옳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압축할 수 있습니다. ‘바른 믿음’과 ‘올바른 삶’, 이보다 더 신앙을 정확하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지금까지의 전개와 다르게 전개됩니다. 4장의 내용까지에서는 율법의 행위를 좇는 신앙에 대하여 여러 방향에서, 여러 가지 논증들을 통하여 그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5장과 6장은 이 논증을 가진 성도의 ‘삶이 어때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라디아서의 전개 과정은 신약의 많은 서신들이 취하고 있는 ‘전반부의 이론과 후반부의 실제’라는 도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갖게 되는데, 왜 신약의 서신서는 한결같이 이런 방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이론’만으로서는 안 되고, 그것을 듣고 배운 신자가 ‘만들어가야 하는 삶’이라는데까지 이르러야만,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교리나 이론만 있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삶에 구현이 될 때에만 참으로 옳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어떤 신앙적, 신학적, 교리적 문제에 대하여 그 ‘잘못을 논증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되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라는 사람이 그릇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의 잘못을 파헤치거나, 그의 잘못을 일목요연하게 반박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은 올바른 것입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어떤 잘못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부정(不淨)을 부정(否定)하는 데’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혹 잘못을 깨어 부신다 하더라도 그 깨어 부심은 반드시 창조적인 다시 세움을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파괴적’이라기보다, ‘창조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부수는 것’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복음의 근본은 ‘창조하는 것’이고, 복음이 이렇게 창조적 역량을 가진 이유는 단 하나, 그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에서 이론만이 아니라 삶까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론’ 혹은 ‘교리’가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실현되는 방식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보이는 세상을 지으신 방식입니다. 신자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므로, 탁상공론이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후, 그것을 보이는 행동으로 만들어 내는 이들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창조적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은 그런 의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이제까지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하여,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유대주의적 사고의 문제점에 대하여 다양한 면모에서 잘못을 논증한 갈라디아서는, 이제 말미에 들어 ‘그렇다면 신자의 삶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나’라는 주제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핵심 구절이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즉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바’를 ‘삶’으로 드러낼 때, 우리가 자주 현혹되고 잘못 빠지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냐 무할례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웠을 때, 그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이것을 세우는 데 있어 잘못된 노선을 택했습니다. ‘성령을 따라서, 복음의 능력을’ 구현하는 대신에, ‘외형주의적인 것으로’, 곧 ‘신앙에서 할례가 중요하다’라는 방식으로 노선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할례를 반대하기 위하여, 무할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잘못을 범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와 같은 주제에서, ‘주일 성수’가 가지는, 신자의 삶에서의 본연, 곧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로서의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일 대신에, “주일에 돈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주일에는 공부를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몇 시 부터가 주일인가? 뭐 이런 주제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어떤 사람이 이쪽 편의 주장을 하면,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 반대편의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A라는 외형과 B라는 외형이 맞붙어 싸우도록! 그렇게 논쟁을 하고 싸움을 합니다. 하지만 핵심이 무엇인가요? 과연 ‘주일 성수’라는 주제에서 핵심은 ‘돈을 쓰느냐 마느냐’나 ‘몇 시부터 주일이냐’ 같은 문제인가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주일 성수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언약 교제로서의 예배와 그 예배를 위한 날’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건져내지 못하면서 A냐 B냐로 싸우는 것, 그것을 갈라디아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한 것입니까? “할례냐 무할례냐”의 문제라고 한 것입니다.

 또 십일조나 음주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들이 이런 문제들을 건드리기 힘들어 합니까? 본연이 아닌 것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면 얼마나 해야 하느냐?”와 같은 문제가 등장하면, 저마다의 주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A쪽 편에 가서 서고, 다른 사람들은 B쪽 편에 가서 섭니다. 음주에 관한 문제도 똑같습니다.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에 어디 나오느냐?”라고 누군가가 말하면, 반대편에서는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은 성전된 육체를 더럽히는 것이다!”라고 되받습니다. 문제는 이쪽도 저쪽도, 이러한 율법적 규례들의 ‘본의’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할례’에 빠진 이들에 반대하기 위하여 ‘무할례’를 주장하는 양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를 정죄한 이유는 할례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 할례가 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할례’에 맞서는 것으로서 ‘복음’이나 ‘그리스도’라는 본질을 말하는 대신에 ‘무할례’를 말합니다. 이것도 외형, 저것도 외형인데, 단지 외형으로 볼 때에 그것이 반대되어 보이기 때문에 틀려 보이는 것에 대한 대답을 반대편 외형에서 찾습니다.

 문제는 ‘할례’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무할례’도 문제가 아닙니다! 할례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무할례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는 목사 디모데가 할례받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헬라인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것을 말할 때에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다”(갈2:3)라고 말했습니다. “할례를 못 받게 했다”가 아닙니다. “할례받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입니다. 왜 이렇게 한 것인가요? 할례도 무할례도, 모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리를 배우고, 믿음을 알게 된 후에, 삶에서 이것을 만들어가야 할 때의 첫 단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할례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대답으로 무할례를 선택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참된 대답은 할례의 잘못에 대하여 무할례라고 하지 않고, 복음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께서 본질이라고 알려주시는 대답으로 응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4절까지 할례를 좇는 이들을 반박하면서 사도는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할례가 틀렸으니 무할례가 답이야”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1-4절의 반박에 대한 대답이 5-6절입니다. 함께 읽읍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그렇습니다!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할례에 반대하는 무할례’가 아니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으로 빚어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

 5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느냐 하면, “신자는 믿음으로 받은 성령님을 통하여,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의의 소망”이라고 할 때의 이 ‘의’는 우리가 이미 받은 칭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로 마지막에 획득하게 될 의에 대한 선언’을 가리킵니다. 곧 최후 심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최종적으로 “너는 의롭다”라고 선언 받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기다립니다. 무엇을요? 지금의 삶이 어떠하건 간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너 참 잘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로워! 너의 삶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올바르다고 입증되었어!” 이 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생각해 볼 때,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며, 무엇을 소망으로 두고, 그것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불신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강남에 빌딩을 가진 건물주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혹은 고3 자녀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 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해 가면서 케어하고 컨트롤 하는 엄마들, 또 지옥과 같은 경쟁체제 속의 회사들 속에서 타인을 누르고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있어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욕망’입니다. ‘땅에 속한 욕망’입니다. 돈, 부, 명예, 권력, 더 많이 갖고, 더 갖고 싶은 것을 갖고, 더 누리고, 더 남들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력입니다. 강남 부자가 목표인 사람들은 회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도 시간을 쪼개어 재테크 강의를 듣습니다. 주말에 시간이 나도 놀러도 가지 않고 부동산을 전전합니다. 더 좋은 회사, 더 나은 학벌이 욕망의 목표인 사람들은 머리에 띠를 졸라매고, 산처럼 쌓인 책더미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추구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신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들에게 그 동력은 ‘세속적인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여러분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루 하루를 무엇을 동력으로 하여 살아가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하루의 삶을 잘 버티고, 또 다음의 날을 기약하고, 좋은 일이 생기건, 나쁜 일이 있건 간에 그것을 잘 이겨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5절 말씀은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오늘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동력은 장래에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의롭다’라고 말씀해 주실, 그 최후의 판단을 향한 소망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버팀목입니다.

 끝으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께서 보여주고 있는 이 ‘의의 소망’은 어떤 식으로 구현됩니까? 이것은 추상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구체적으로 삶에서 현실화되는 실제적인 것입니까?

 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약 참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면, 너희에게 이 소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는 할례나 무할례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너희가 진짜 이 소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하나뿐인데, 그것은 너희 삶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다시 말해 ‘사랑으로 활성화되는 믿음’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 보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여기 ‘믿음’, ‘소망’, ‘사랑’이 나오는데, 특히 ‘사랑’에 주어진 수식어는 ‘수고’입니다. ‘사랑의 수고’, 즉 사랑이란 ‘고생이 동반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의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삶에서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고생’을 징표로서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절 말씀은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의의 소망”, 곧 최후의 심판 때에 네가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려면 너는 반드시 삶에 ‘사랑의 수고’를 가져야 한다. 의의 소망은 관념이 아니라 ‘삶 가운데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옮겨보자면 “기다리는 자는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습니다. “할례냐 무할례냐” 그런 데서는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신자의 정체성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디에 신자의 ‘의의 소망의 기다림’이 나타납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 ‘사랑의 수고’를 나타낼 때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활성화됩니다! 믿음이 그 본연의 위력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사랑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은 믿음의 열매이자 결과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올바른 믿음이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을 “사랑의 수고를 하라”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활성화’되는 것이지요. 말로만 믿지 마십시오. 바로 옆에 있는 지체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마음으로만 사랑한다 하지 말고, 내 것을 덜어, 주는 방식으로 사랑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본이 ‘수고’, 즉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적 지식으로 ‘의의 소망’이 무엇인지 입에 기름이 발린 것처럼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의 삶을 조금도 덜어줄 생각이 없는 사람보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고 손해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훨씬 더 ‘의의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에 창조의 능력을 끼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닮은 형상을 이 땅에 보내시기를 원하셨고,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이들은 바로 이것을 알고 실천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우리가 신앙하고 있다는 증거요 결과물인 것입니다.

 남들이 몰라도 됩니다. 꾸준히 사랑합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실천의 손을 내미십시오.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십시오.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의 수고를 베푸십시오. 내 것, 내 가족, 내 소유, 이기적인 것에 탐닉하는 대신, 조금 더 마음을 넓게 열어, ‘사랑의 수고, 사랑의 고통’을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외적인 표식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이런 성도의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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