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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1-09-12 (일)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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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댓가
제자도의 댓가
2021년 9월 12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읽기 : 눅9:18-27,51-62
설교본문 : 눅9:6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성도여러분!
 본문에서 계시된 예수님은 어떤 일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확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갈 것을 결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사역의 수행과 자신의 양떼들을 사랑하려는 주의 거룩한 결심은, 주님의 발걸음을 더 빛나고 확고부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구도 이런 주님을 훼방하며 가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실로 완전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반면 등장하는 제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이런 헌신이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일임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기꺼이 포기하셨습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여러분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거나 부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료들, 이웃들, 지인들에게 “아니요”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가족들의 기대보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의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저는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오늘 본문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의 설교 주제는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큰 희생을 요구한다”입니다. 이 주제로 다음 세 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개인적인 요구의 관점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
 2. 사회적인 요구의 관점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
 3. 가족의 요구의 관점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1. 개인적인 요구의 관점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놀랍고 멋진 고백이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공적 사역을 수핸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고기잡이 하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고, 또 세관에서 일하든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은 스스로 예수께 나아온 자원자입니다. 그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들어오려 했습니다. 그는 주 예수를 교사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이 랍비 예수로부터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듣고 배우는 이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고백으로 보건데 이 사람은 인생의 한 시점에 잠시 동안만 따르는 것을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를 따를 것을 말합니다. 게다가 그는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여러분, 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말씀하시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올바른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지금 예수께 이 말씀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그는 주 예수를 따르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 것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곧 겟세마네, 골고다,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영광스러운 편에 붙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에서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여러분, ‘인자’라는 말은 단7:13에서 온 이름입니다. 인자는 메시야에 해당되는 구약 이름들 중 하나입니다(단7:13-14).

 구약에서는 인자, 메시야가 영광중에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자가 나라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자가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방언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고 결코 폐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어쩌면 이 지원자는 자신이 지금 이 나라에 최우선적으로 들어서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몇 가지 교정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니엘이 환상에서 본 그 인자,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께서 권세와 나라와 영광을 준 그 인자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자신이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눅9:22절에서 “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때 다니엘의 이상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부당하고 고난 받는 인자를 따른다는 개념은 1C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귀에 거슬리는 충격이었습니다. 이 지원자는 어리벙벙해졌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이 지원자에게 너는 거부당하는 지도자를 따를 것을 제안했다고 말씀합니다. “너는 지금 이 땅 위에 거할 곳이 없는 그런 사람을 따르겠다고 제안하고 있구나. 나는 거처가 없다. 나는 왕궁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공중의 새와 들판의 여우도 나보다 더 낫다. 여우들도 굴이 있다.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다.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네가 만일 인자를 따르려고 한다면, 너도 인자의 거부당함과 고난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너도 인자의 궁핍함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너의 개인적인 요구들을 모두 제쳐두어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는 길에 개인적인 요구들이 있을 자리가 없다. 만일 네가 너의 개인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원한다면, 너의 육신적인 편안함을 만족시키기 원한다면, 인자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다른 곳으로 가라. 인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 너의 앞에 있게 될 희생을 생각하라. 이 인자를 따르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승리의 행진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이 열정적인 지원자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가 자기 주인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주인이 거처가 없다면, 제자도 거처가 없을 것입니다. 주인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 주인은 이 땅 위에서 머리 둘 곳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거할 방 한 칸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집에도 거할 곳이 없었습니다. 요7:5에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향 마을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유대는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거라사인과 그 인근 지역인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께 떠나시기를 구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수께 밤에 잠잘 거처를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그 땅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추방했습니다. 그 땅은 예수님을 공중으로 던져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는 그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거부한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하늘도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지도자를 따르는 것의 대가,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서 여우들과 공중의 새들에 대한 언급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공중의 새들”은 이방 민족들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들로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마13:32에서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 새들이 오는데, 이는 이방 민족을 상징합니다.

 또한 ‘여우’는 암몬 사람에 대한 상징입니다. 느4:3에서 우리는 암몬 사람이 여우로 언급되는 것을 읽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몇 몇 암몬 사람들이 지켜보러 나왔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암몬 사람 도비야였습니다. 도비야는 유다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라고 비웃었습니다. 이 유다인들의 원수들인 암몬 사람, 즉 여우들은 그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약 시대 동안 이 유대 땅, 팔레스틴 지역은 에돔 사람과 암몬 사람의 혼합된 조상을 가진 헤롯이 다스렸습니다. 눅13:32에서 주 예수께서는 이 헤롯왕을  ‘저 여우’라고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공중의 새들 곧 이방인들/로마인들은 이스라엘의 집에 거처를 가지고 있다. 여우 곧 헤롯은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 거처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빼앗겼다. 네가 나를 따른다면, 여기에 집 없는 사람들의 대열에 동참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만일 네가 위로, 권세, 영향력을 원한다면, 공중의 새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간에 둥지를 틀고 있는 자들에게로 가라. 로마인들에게로 가라. 여우, 곧 여기에 자신을 위해 좋은 작은 굴을 파고 있는 자를 따라 가라. 다른 한편, 인자는 아무런 힘이 없이 홀로 서 있다. 너는 정말로 거부당한 인자를 따르기를 원하느냐? 너는 정말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들을 이루는 것보다, 위로를 받고 존경을 받으며, 이 땅에서 거처를 갖는 것보다 인자를 따르고 싶은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지원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는지 잘 모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예수님을 쫓았는지 혹은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길 위에 서서 예수님이 가시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 예수를 따를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인자를 따라가는 것은 고난을 받을 것을 함축합니다. 인자를 따라가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인자를 따라가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세상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자를 따라가는 것은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에 그들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요구는 아주 실제적이며,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요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요구가 주님의 요구의 뒤에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좇으리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2. 사회적 요구의 관점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두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달리 번역하면, “지금 바로 나를 따르라.”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는 개념에 열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처리해야 할 몇 가지 다른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자기 아버지를 장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여러분, 이 사람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이 사람의 말은 아버지가 지금 죽었고 그래서 장례가 이제 2-3일 내에 치러져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이 사람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그는 그 순간에 매장을 위해 시신을 수습하고 실제로 장례를 치루어야 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 시간에 길 위에 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대 기후의 나라들에서 장례식은 매우 빨리 치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으면 바로 죽은 그 날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당대의 근동에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라!”는 표현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를 모시게 하라.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모시게 하라. 그래서 아버지가 죽을 때에 아버지를 장사해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라.”는 구절은 집에 머물러 자기 부모가 죽을 때까지 부모들을 돌봐야 하는 아들의 의무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사람이 예수께 말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당신을 따라 갈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나로 가서 나의 아버지에게 그의 생애의 나머지 동안 좋은 아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나는 와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는 먼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연기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늙어서 죽은 후에, 10년 혹은 20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요구했을 때에, 이 사람은 한편으로 주 예수의 요구에 직면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당대의 사회적인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그 사회적인 요구는 자기 부모가 죽을 때까지 집에 머물러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부모가 죽은 후에만 이 사람은 다른 선택을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공동체의 기대에 이웃들의 압력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새로 부름받은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공동체는 나에게 특정 요구를 한다. 이 사회는 나에게 특별한 기대를 한다. 이 요구의 요청은 강력하다. 당신은 나에게 이 공동체의 표준과 기대들을 범할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확하게 주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사회의 전통적인 요구를 던져버려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내버려두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그런 공동체의 기대들과 문화적인 요구들에 관심을 갖게 두라. 그러나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세상의 일, 이 땅의 일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염려하게 두라. 그리고 너는 생명, 하늘나라의 새 생명에 관심을 가지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람의 선택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따랐던지, 혹은 자기 공동체의 관습대로 행하기 위해서 주님께 등을 돌렸던지 어떤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사람은 선택에 대해 말하기보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집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요구와 우리 사회의 요구에 직면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께 잠시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합니까? 해야 할 다른 일, 다른 요구들이 있다고 말합니까? 아니면 동료들의 압력, 공동체의 기대들, 사회의 요구들을 제쳐두고 지금 바로 주 예수를 따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를 다스리는 어떤 권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더 높지 않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회적인 요구들, 그것이 가족들의 기대이든지, 친구들의 바람이든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의 요구이든지, 오늘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요구이든지 어느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들과 친구들의 요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말로 주 예수를 따르는 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입니다.

 3. 가족의 요구의 관점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예수께서 세 번째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이 세 번째 사람도 첫 번째 사람처럼 자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61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

 얼른 보면 이 요구는 상당히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요구를 더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나은 번역은 “주여, 나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 나의 집에서 그들에게 떠날 것을 고하게 하소서.”입니다. 즉 이 사람은 집에 가서 떠날 것을 허락받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여, 내 부모가 나에게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을 따라갈 것입니다. 당신을 따라가기 위해서 나는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가족의 권위, 나의 부모의 권위는 당신의 권위보다 더 큽니다. 나는 부모에게 가족에게 먼저 복종해야 합니다.”

 이 대화를 듣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즉 “물론, 그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먼저 너는 가서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라. 만일 가족들이 허락한다면 네가 가족들의 허락을 받는다면, 그때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 번째 사람의 아버지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요구하셨습니다. 본문 62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날마다 농사짓는 일, 들판에서 쟁기질 하는 것에서 예를 취하셨습니다. 농부는 항상 밭고랑을 똑바로 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소 두 마리 사이를 잘 보아야 합니다. 농부는 이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만일 농부가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곳을 보면 밭고랑은 구불구불하게 될 것입니다. 쟁기질은 연속되는 집중적이고 힘든 작업입니다. 만일 쟁기질을 할 때 뒤를 돌아보면 다 망쳐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합니다.

 여러분, 정말로 대단한 이미지가 아닙니까?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충성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이 두 충성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높은 우선순위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둘이 충돌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들에 대한 충성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권위가, 하나님 나라의 요구가 다른 모든 관계들보다 우선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충성의 충돌을 해결할 수 없는 사람, 즉 어떤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이라고 말하고 다른 때는, “나의 가족이 먼저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익한 일군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이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가? 못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는 다른 모든 충성보다 우선합니다. 그것은 값비싼 대가,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열매 맺는 일은 노력을 해야 하고 집중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쟁기에 손을 올려 두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먼저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를 위하여 무엇을 버렸고 포기했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주와 하나님 나라가 더 우선적인 가치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 갱신의 예배를 얼마나 사모하며 준비된 자세로 참석할 것인가? 직장을 구하고 학점관리를 하는 것에 부담이 있을지라도 주일 성수하며 언약의 자녀들과 함께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뒤로 밀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돈의 무서움을 알고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되, 돈 자체가 행복의 수단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복된 일이고 보상이 주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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