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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3-15 (일)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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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속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여야 할까?
위기 속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여야 할까?
2020년 3월 15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봉독 : 벧전2:4-12, 빌3:1-14
설교본문 : 벧전2: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개혁의 후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라는 말은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신앙 체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를 개혁한다는 말은 신앙체계, 곧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경험하는 방식을 개혁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있어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있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그 폐해를 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오해하여 계명을 지켜야한다는 율법주의로 이해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사는 삶을 기피하면서도 스스로는 구원받은 것으로 자위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또 반사회적, 인륜적인 길을 걸으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만은 구원을 얻는 총수의 합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는 신천지와 같은 집단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고립되어 사회로부터 이탈하지 않았다면 신자들도 대부분 국가와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며 깊숙하게 그들과 연동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최근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자 두렵고 불안한 사회는 교회에게 공적모임을 당분간 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예배와 기도는 집에서 해도 되지 꼭 교회당에 모여서 해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말인가? 헌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모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신천지에 대한 비난을 교회에 똑같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책임이 있는지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주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인 교회에게 명하여 주의 아름다운 덕을 증거하라 하신다.”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둘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1.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이 편지는 사도 베드로가 당시 로마 통치하에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등 지금의 터키 지방에 주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벧전1:1-2). 당시의 교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많은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벧전1:6; 3:13-17; 4:12-19; 5:6-10).

 여러분! 교회가 외적으로 핍박이 있고, 신앙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지금도 그렇지만 신앙생활에 회의가 들기도 하고, 여러 잘못된 가르침의 꾐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르침을 쫓으며 세속화되어 가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이 당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산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거나 혼탁하게 만들고 유대교를 좇아가거나 세상과의 친화력을 높이는 등, 다른 소망을 좇아가려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당시 성도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자 교회는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시키고, 신자의 삶이 무엇이며, 그 소망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5:13에서 이 편지를 기록한 목적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참된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 안에 서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베드로전서 2:4-8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4-5)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흥미롭게도 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너희도 산 돌같이”라는 말은 “산(살아있는) 돌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릿돌이라면 그리스도인은 그 머릿돌에 붙어 있는 돌들이라는 뜻이고, 이 돌들은 머릿돌에 붙어서 신령한 집을 지어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설명합니다. 베드로전서 2:6-8을 보십시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여기에 구약성경 세 곳을 인용하여 머릿돌이 무엇이며, 그 머릿돌과 어떤 관계로 엮어져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 2:6은 이사야 28:16을, 2:7은 시 11:22이며, 2:8은 이사야 8:14을 인용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보배로운 모퉁잇돌”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 건축자들이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보배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된다고 말하면서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논의의 결론으로 산 돌이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돌들이 신령한 집을 짓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9절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특권과 책임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택하신 족속”이나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나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네 가지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관계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때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온 세상의 왕이시며 통치권자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세상의 중보자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의 역할을 통하여 나타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위치에서 속죄하며, 죄의 비참이 빚어낸 결핍과 상처들을 슬퍼하면서 속히 완전한 구속의 날이 올 것을 고대하면서 현실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신자의 위치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일입니까?

 다음으로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어떤 것과 구별된다는 뜻도 있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히 구별하여 도덕적으로 깨끗한 자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영생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자라는 사실도 흐릿하지만, ‘거룩’을 위하여 부름받았다는 ‘도덕성’에 있어 하나님의 영생 안에서 삶을 사는 거룩한 존재라는 점에 있어 너무 미숙합니다. 구원이 행위의 결과는 아니지만 감사의 열매라는 인식이 너무 결여됨을 봅니다. 구별됨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과제라 여겨집니다.

 또 베드로는 신자들을 가리켜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의 온전한 뜻은 구약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베드로는 이 말씀을 해석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내 소유”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세굴라”(segullah)라는 말인데, 아주 보배롭고 보배로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보배로운 존재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상에서 사도 베드로가 신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네 가지 표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주셨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그 이유를 베드로전서 2:9-10에서 설명하기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신기하고도 놀라운 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아름다운 덕”은 헬라어로 “아레테이”라는 말인데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 본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벧전2:10).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선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긍휼을 받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당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덕‘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아름다운 덕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이름다운 덕을 전파하려면 어떤 삶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바로 그 점을 베드로전서 2:11-12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 “ 나그네와 행인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뜻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 “육체의 정욕”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추구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성실하고 책임있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려는 욕심, 거짓을 말하고 과장하여 자신을 나타내려는 욕심,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의 발로인 교만과 거만함, 돈이든 권력이든 어떤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자신이 잘났다고 드러내려는 죄악된 욕망 등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의 형제 베드로와 또 다른 친구들이 예수께 나아왔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기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하셨을 때의 그 ‘구한다’라는 말은 “찾다, 무언가를 탐구한다, 혹은 바라거나 갈망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것을 찾기도 하고 탐구하기도 하고 갈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과 연결될 때 그것은 “인생에서 우리가 무엇을 향하여 가고 있느냐?”라는 질문과 상통합니다.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냐?” 이 질문은 다시 말하면, “너는 지금 나를 좇고 있는데, 너는 나를 좇는 일을 통해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좇아가는 신앙의 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지금 질문받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의 당사자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주님을 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거의 직전까지도 제자들에게서 보인 모습에 의하면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권세를 잡으시면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주님을 좇았습니다. 현대의 신자들 중에서도 주님을 좇을 때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병고침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업을 위한 친소관계를 얻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기도 하며, 사람이 좋아 교제를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근원적인 질문’인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주님을 좇고 있습니까?”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 이렇게 현세적이고, 땅의 것 중심이고, 육의 것이 이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에 대한 몰이해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유물론적인 세상이 아니라영적인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하늘의 참 장막을 섬기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땅은 원형이 아닙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참이 아닙니다. 땅과 그 안의 그림자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참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 땅의 어떤 보화가 설명되었다면, 그것은 더 나은 하늘의 영광을 가리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는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좇아가는 이유는 칼빈의 대답처럼 “사람의 사는 첫 번째 목적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1문답),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임”(3문답)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이유”로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편익의 이유로“ 즉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성경의 하나님과 이교도의 종교의 신들과 혼동하여 그릇된 방식으로 신앙 생활하며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봅니다. 자신은 성실하게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전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을 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이성 문제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말로는 주의 일, 영광을 말하면서도 교회 연보를 개인 돈처럼 사용하다 교회에 큰 시험을 주는 일들. 자신의 신앙을 권력을 얻는 도구로 쓸 뿐 참으로 신앙의 가치를 지키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국가와 시민을 더 나은 삶으로 살도록 봉사하는 국회의원과 공직자를 보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한민국과 동일시 여겨, 국가의 정책에 대해 교회가 사사건건 관여하는 것이 충성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촛불과 태극기를 들었던 양 집단에 기독교인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영의 차이는 한 교회 안에 더 이상 형제자매로, 한 몸이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국가의 법과 보편적 상식에 반하는 일을 하면서도 주의 이름과 영광을 내세우며 밀어붙이기도 하고 그러다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주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고 자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현재 한국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모습들은 성경에서 계시된 믿음으로 상속받은 나라와는 너무나 다른 양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단이 더 큰 소리를 내고, 수많은 언약의 자녀들조차 이단에 미혹되어 참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한국교회의 민낯과 이단들의 거짓됨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국가경제의 쇠락, 개인의 생명과 재산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오는 위험만이 아닙니다. 거짓과 진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조국 교회의 실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위기입니다. 교회가 엄청난 격랑에 휘둘리는 위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삶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착하고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 신자들이 선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 “본다”는 말은 일정기간 동안 주의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 때 한 순간의 삶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행실을 선하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구원의 사역을 선전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자의 착한 행실은 복음전파의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마5:16).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읽은 본문인 빌립보서 3:10-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그가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을 14절에서는 “푯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화원언약교회 믿음의 가족들도 바울처럼 이 푯대를 위하여 달려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신비한 믿음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저는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룩한 추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사태가 전국을 사로잡고 있는 이 시점에 예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공적 모임조차 질시와 지탄이 되는 이 지점에서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교회아’로서의 우리 내부를 개혁하고 한국사회에서의 교회의 실질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서 개선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너무 부해지려 하지 않습니까? 혹 자신의 삶이 성공하지 못할까 초조해하며 온통 마음을 그것에 빼앗기지는 않습니까? 남들의 시선에 과도하게 신경을 빼앗겨 주를 섬기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나 직장이 아니라, 남들이 인정하거나 부러워하는 위치에 서 있기를 갈망하지는 않습니까? 전염병은 분명 재난이고 위기입니다. 교회의 기도가,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산 위의 동네로서의 표상을 증거 해 왔다면, 이 패닉과 같은 위기에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에게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호소를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현실은 지탄과 혐오를 보내고 있습니다. 전염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생각하기에는 지나칩니다. 이 모습이 현재 일반인의 인식 속에 있는 교회의 평가로 보여지기에 참으로 슬프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산 돌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서 살아 있는 돌들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교제하는 복도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은덕, 죄용서와 영생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책임도 가지고 있습니다. 언약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늘 감사합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매여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늘 방식으로 사는 자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 그 어떤 것(대상이나 상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살게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 그 일을 위해 나의 생애가 드려지지 않고 육의 일에 집착하거나 사로잡히며 사는 것을 늘 경계합시다.

 신자는 참된 행복이 세상의 성공과 부와 육체의 건강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에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예수의 나라, 부활의 나라,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의 나라를 믿음으로 보고, 소유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을 통해 우리의 이웃들이 그 영광의 실재를 볼 수 있도록 복음의 증인, 행복 바이러스가 됩시다. 그래서 ‘죽음’에 지배당하며 일생을 사망의 종이 되어 오직 ‘현재’만을 섬기는 자들에게 영원한 내일이 있음을 알려줍시다. 주께서 여러분의 모든 소위를 아시며 일마다 때마다 위로하시며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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