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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1-11-07 (일)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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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창조의 두 번째 세상 이야기
첫 번째 창조의 두 번째 세상 이야기
2021년 11월 7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봉독 : 창9:1-17, 레17:10-16
설교본문 : 창9:15-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9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첫 부분은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이 부분의 중심 주제는 “피를 흘리는 것”과 관련되니다. 둘째 부분은 8절부터 17절까지인데, 이 부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후손들과 언약을 맺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18절이하의 내용으로 그 중심 내용은 노아가 술에 취한 일과 그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들에게 내린 노아의 계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 둘째 부분의 말씀을 상고하려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첫 번째 창조의 그 땅에서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입니다.” 노아 홍수의 심판 요소에만 너무 치중하지 마시고 구속의 하나님의 일하심에 더욱 주목하기 바랍니다.

 시간의 시작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지으셨습니다. 노아홍수는 첫 번째 창조의 세계가 끝나고 그 땅에서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조 때주어진 문화명령이 홍수 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울려 퍼집니다. 9장 1-7절의 내용은 1,7절이 반복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옛 세계를 멸망시키시고 다시 새 세계를 시작하셨을 때, 노아의 교회에게, 다시말해 신자들에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창조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창조명령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에서 “동물을 먹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2절을 보십시오. 여기 보면 “모든 짐승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두려움”과 “무서움”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두려움”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공통점입니다. 즉 이 말씀의 뜻은 “땅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하나님처럼 사람인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절의 끝은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다”, 여기에 “주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즉 동물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소유권”을 보여 주는 보다 더 강력한 표현입니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그 땅이 패괴하여 강포함이 가득하게 되어 홍수로 심판받게 되었지만,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께서 그 땅의 두 번째 세상을 여시고는 다시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권을 노아에게도 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심판 후 생존한 그 땅의 피조물들이 다시 창조질서를 따라 노아의 소유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노아의 다스림을 받으며 복종할”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 세상을 사람들에게 주시면서, 그들의 통치권, 그들의 왕권을 인정해주신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4~6절까지의 말씀이 덧붙여 있습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 왜 고기를 피 채 먹어서는 안 될까요? 5절에 힌트가 나옵니다.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 피가 곧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레위기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7장 10절,11절입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피가 몸에 좋지 않거나, 피를 먹는 행동이 끔찍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처럼 위생의 이유나 도덕의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소유의 문제입니다. 온 세상의 진정한 소유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의 유비”이고, 따라서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의 첫 부분의 요지는 아주 논리적인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1절과 7절은 같은 명령으로 되어 이 창조명령이 아담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명령”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와 아들들은 아담처럼 생육하고 번성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절과 3절은 이 받은 명령을 조금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설명해 줍니다. 모든 동물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든 동물이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며, 모든 동물을 다 먹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소유권을 보여주며, 모든 세계의 통치자가 바로 사람(교회)이 될 것임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4절 이하의 말씀은 이 통치권을 수행함에 하나의 제동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에 한 번 멸망 당했습니다. 따라서 노아와 후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아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지만, 진정한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노아와 아들들은 아담과 같은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같은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동물을 먹일 수 있고, 또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동물을 잡고 먹더라도, 피를 먹지 않음으로써 “신앙고백”해야 했습니다. 생명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인류는 세상 모든 동물들을 다스리더라도 그 생명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고기를 ‘피’ 채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는 생명에 대한 규례외에 한 가지 더 고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에 대한 규례”입니다. 레위기 17:10-11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라는 말씀으로 나타나지만, 여기에 덧붙여서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에 이 피는 “먹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단에 뿌려져야 할 것”임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즉 피의 문제는 단지 음식법의 문제로만 여겨서는 안 되고, “죄를 속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내용이 여기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 말씀은 분명히 “살인에 대한 경고”입니다. 5절과 6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즉 사람의 생명을 뺏는다면, 내가 반드시 그 사람에게 똑같은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즉 피는 피로, 생명은 생명으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를 죽인 사람은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피를 흘렸다면 피로밖에 그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은 분명히 살인에 대한 경고입니다만, 이 말씀이 “피를 먹는다”고 하는 레위기의 주제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창세기 9장의 이 피에 대한 규례 역시 우리를 속죄에 대한 주제로 이끌어 갑니다.

 오늘 말씀을 “속죄”라는 주제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피는 피로, 생명은 생명으로” 이것은 단지 살인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동시에 “속죄의 규례”이기도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사람이 생명을 속죄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사람의 생명을 속죄받기 위한 속전으로서는 사람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이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짐승제사의 의미

 여러분 창세기 9장과 레위기 17장의 말씀은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주어진 동물 희생 제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속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동물제사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동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 9장 5절과 6절의 말씀에 의하면 이것은 “그릇된 방식”입니다. 동물을 죽이는 것으로서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제사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소와 양을 죽이는 것 그 자체로는 사람의 죄를 전혀 씻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구약의 이 제사는 무엇입니까? 의미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의미 없는 제사를 제시한 것입니까?

 구약의 모든 제사는, 구약 시대부터 이미, 그 제사 자체로 사람의 죄를 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사람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였습니다. 창세기 9장의 말씀과 율법의 제사법은 모두 같은 구약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짐승 제사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없다고 말하고, 다른 편에서는 짐승 제사로 사람의 죄를 씻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짐승들은 모두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비춰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우리는 “피를 먹지 말 것”이라는 규례를 통해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사실도 발견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멀찍이서 발견합니다. 8장 20절 말씀을 보면 노아 때 이미 정결한 짐승을 취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노아 때 이미 짐승 제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받은 노아는 짐승을 드리는 제사가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아직 가늠할 수도 없는 미래에 오실 것이지만, 흐릿한 눈으로 이 메시야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홍수 후의 세계,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이 죄 때문에 멸망 받은 세계에 대해, 죄로부터 건져주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피에 대한 규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이미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땅의 왕으로 삼으심으로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호의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담을 죽이시지 않고 가죽옷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의 후손 가인은 다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형상인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용서를 위한 호의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다시 인류는 죄악이 만연하여 노아의 시대에는 그 땅의 사람들이 죄악으로 패괴하고 강포가 가득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은 홍수로 모든 세계를 벌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다시금 속죄, 용서하실 것을 말입니다. 홍수 후의 이 규례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단락에서 언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특히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실 때는 종종 그 언약의 표징을 주실 때가 있는데, 홍수에 대한 언약의 표징은 무지개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이 11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어지는 12절과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무지개입니다. 여러분! 무지개가 무엇입니까?

 무지개는 영어로 “rainbow”라고 하는데, 비를 의미하는 “rain”과 활을 의미하는 “bow”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영어에도 무지개가 “활”이라고 하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이 사실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는 “무지개”라는 말이 말 그대로 “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에는 “활”과 “무지개”가 다른 단어이지만, 히브리어에는 “무지개”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냥 “활”입니다. 13절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내가 내 활을 구름 속에 두었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개의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지개가 “활”이라고 했을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활”을 걸어 두셨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언약이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셨습니다.
 활은 어떻게 미화를 하더라도 전쟁무기입니다. 불신자들은 무지개를 과학적인 이유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늘에 모양을 걸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꼭 활 모양으로 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활을” 걸어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사실은 비록 오늘 본문이 “다시는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무지개가 주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인류는 모두 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진노의 활을 들어 세상을 향해 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평화의 약속으로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활은 활입니다. 하나님은 전쟁무기를 하늘에 걸어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인류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반역하여 멸망당했던 과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불의한 자들을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약은 언제나 양면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약속하셨지만, 반면 그 평화의 언약은 동시에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언약에의 순종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활시위는 다시 당겨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지금 활은 “걸려” 있습니다.

 활이 걸려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지금 전쟁을 멈추셨다는 뜻이고, 우리를 향하여 시위를 당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의 벽화에서 왕이 전쟁을 마치고 휴식하는 장면에 그의 머리 위 벽에 활이 걸려 있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기를 그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늘에 무지개가 뜰 때 무지개가 아래로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위쪽으로 둥그런 모양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무지개를 우리에게 주실 때 아래쪽으로 둥그런 모양으로, 곧 활시위가 땅을 향하여 당겨지는 모습으로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경고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무지개를 주셨다면, 무지개는 아마 땅을 향하여 시위가 당겨진 모습으로 주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지개를 시위가 하늘 쪽으로 향하게, 즉 활을 사용하지 않고 벽에 걸어 두었을 때의 모습으로 주셨습니다. 활은 비록 전쟁무기이긴 하지만, 이 활은 겨눠져 있지 않습니다. 활은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과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여기 주어는 모두 “나”입니다. 1인칭 단수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걸린 활”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안심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맹세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기억하겠다. 다시는 멸망치 않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에서 언약의 또 다른 편인 인류는 여기에 아무런 맹세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맹세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8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하나님도 나오고 언약 대상자인 노아와 그 아들들도 나옵니다. 하지만 11절부터는 언약의 내용도 나오고, 언약의 증거도 나오는데, 그 언약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리라는 내용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맹세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후손들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맹세합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언약을 지키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마치 자신이 잘못 하신 것처럼” 스스로 맹세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물로 멸망하지 않겠노라!” 왜 하나님이 맹세하십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피는 피를 요구합니다. 생명을 빼앗겨야만 한다면 빼앗겨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생명을 빼앗기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피흘린 심판을 내가 받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십니다.
 무지개 언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이 맹세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활을 겨누어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습니까? 왜 잘못은 우리가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저는 이런 문제를 아버지가 되고 나니까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세상에 여러 순리들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아빠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라는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부모의 마음”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고, 자식이 아무리 부족한 아이여도, 아빠, 엄마이기 때문에 자기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하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고, 그걸 우리들에게 조금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이것이 우리가 하나니의 형상인 이유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홍수의 역사는 슬픈 것입니다. 홍수는 비참한 것입니다. 죄와 반역으로 인류가 멸망 당한 슬픈 과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인류 전체의 비참 속에서도 빛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항상 즐겁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시므로, 모든 것을 잘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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