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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1-02-07 (일)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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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용서의 하나님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
2021년 2월 7일 주일 오전 설교
성경 읽기 : 눅 15:11-32
설교 본문 : 눅 15:24,3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복된 회중 여러분!
 최근 한국사회는 진영 간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있습니다. 정치적 이해에 따른 정파적 갈등과 부의 계층 사이의 계급적 갈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유층 자녀들이 부모의 연 소득과 아파트의 평수에 따라 친구를 사귀는 등의 친소관계를 설정하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합니다. 갑질에 대해 분노하고 공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행하는 갑질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특정 이슈에 대한 사회적 긴장이 교회로 넘어온 것도 있고, 어떤 것은 교회로부터 야기된 갈등도 있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에 따라 태극기와 촛불로 양분되고, 동성애와 젠더 관련 이슈로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갈등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코로나와 관련해 정부의 방역 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로 야기된 긴장과 갈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문제들이 그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 가치관에 의해 표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집단화해서 정치세력화되고 있는 실증입니다. 처음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발병되었을 때, 명칭문제로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또 공항검역에서 전면 통제하라, 하지 말라는 문제로 분쟁하던 것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노선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가 교회의 형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진리 문제로, 참신자의 표지됨의 증거로까지 확대되어 교회 간에, 또 교회 내부의 구성원 간에도 갈등을 야기하는 모습을 봅니다.

 산업화가 일어난 서구에서 전통적 기독교 가치가 위협받고 이교도화 되는 현상은 교회 역사에서 확인되는 바이지만 유독 한국교회는 정치세력과도 연동되어 일반인들이 교회에 대해 가지는 반감은 질시를 넘어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과학적 사실까지 무시하고 신화화하는 일부 교회와 목사들의 형태는 교회혐오를 부추기는 원인제공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며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습니다.

 정부와 정권을 구분하지 못하고 또 비록 대한민국에 거소를 두고 있는 국민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구분하지 못해서 일어난 무지의 소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빚어진 일입니다. 형제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없음에도 이념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너’를 인정하지 않는 편가르기의 문화에 교회조차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의미의 이웃관을 가지며, 당대의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을 내팽개치며, 자신들에게만 약속된 메시아 왕국을 고대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끊임없이 충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 또한 그 연장선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세리와 죄인들로 비난받는 한 그룹과 또 스스로를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들의 한 그룹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가 옳은가? 누가 내 형제인가? 하는 이 갈등과 논쟁은 참으로 불필요하며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논쟁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도 모두 한 언약에 의해 묶여져 있고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그들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세리이든지, 죄인이든지, 바리새인 서기관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다 찾아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 잃어버린 죄인 하나를 찾게 되면 하늘에서 큰 소리로 즐거워하며 기뻐합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을 때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 본문을 사용하여 죄인을 찾는 것이 하나님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그가 어떤 그룹에 속하였는지와 상관없이 죄인을 찾은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모범을 보여주며 우리들이 어떤 위로와 교훈을 얻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오늘 저는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를 찾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는 주제로 주의 말씀을 설교하려 합니다. 이 주제로 다음 두 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
 둘째, 아버지의 불쌍히 여김에 대한 도전입니다.

 첫째,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비유는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제목만으로도 탕자의 이전과 이후의 변화에 대하여 예측 가능하고 이런 변화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제목은 ’탕자‘가 이 비유의 중심인물이 되게 합니다. 우리 또한 탕자 중심으로 이 스토리를 읽기에 탕자의 행동을 조명하고 그 행동의 변화를 쫓아갑니다. 비유 전반부의 이기적 탕자의 모습과 후반부에 집으로 돌아온 이후의 둘째 아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이를 회개의 증거로 삼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도 이 탕자처럼 회개하며 돌아올 것을 요구합니다. 방황하는 자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자들, 영적 침체에 빠진 자들은 탕자처럼 회개할 것을 적용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황하는 자들이 회개할 때, 확실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받아주실 것을 적용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이런 적용은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더 조심스럽고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과연 이런 적용이, 이런 해석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정당한가?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살펴본 해석과 적용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비유 전체는 둘째 아들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언급하는 데,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에게만 포커스를 맞추고 이 부분을 간과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히려 둘째 아들의 돌아온 시점부터는 이야기의 전개가 아버지와 첫째 아들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부분이 다루어지지 않게 됨으로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비유 속의 아버지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의 제목이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비유임을 말씀드립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비유 속에 재산이 비교적 여유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이 12절에 있습니다. “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부모가 살아 있는데, 재산을 분배해 달라고 하는 둘째 아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거나, 아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유 속의 당대의 청중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그들에게 이 상황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풍습에서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자기 분깃을 아버지에게 요구했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고 큰소리로 외친 것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요, 패륜입니다. 이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목숨보다도 아버지의 돈에, 재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비유에서 이런 요구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은 더 충격적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기적인 요구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분깃을 요구한 둘째에게도, 또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않은 첫째 아들에게도 각각 그 분깃을 나눠준 것입니다.

 당시의 일반적 풍습대로 아마 첫아들은 ‘삼분의 이’를, 둘째 아들은 ‘삼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받은 분깃을 바로 현금으로 바꾸어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둘째 아들이 자기 가족과 의절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의절하며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 행적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직면한 상황을 예수님은 기근이라 말합니다. 이 ‘기근’은 자연적 현상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언약적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기근’이라는 단어사용을 통해 이 둘째 아들이 얼마나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의절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기에 어떤 유대인도 돼지와 접촉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의절하고 먼 나라에 간 이 둘째 아들은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는 전적으로 완전히 자신의 환경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간 먼 나라는 지리적으로 먼 나라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 기업에서 어떻게 제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돼지 곁에 앉아 있는 이 사람에게 긍휼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아들은 이제 자기 삶을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흔듭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의지할 대상도 없고 자신을 돕는 누구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급기야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8,19절).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 아들의 말을 회개의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엄밀하게 회개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 아들의 표현은 하나님의 재앙을 받던 애굽왕 바로가 한 말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여덟 번째 재앙으로 메뚜기가 애굽 전역의 채소와 푸른 것을 다 먹어치운 후에 “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께 요청하여 이 재앙을 제거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로가 자기 죄 때문에 상한 마음으로 회개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바로는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둘째 아들은 회개의 시편인 시 51편과 같은 말씀에서가 아니라,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바로의 절박한 요청으로부터 가져온 이 말을 입에 담고 있습니다. 바로와 마찬가지로 이 아들에게도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가진 회개를 찾을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단지 고픈 배를 붙잡고 자기의 곤경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째 아들이 어떻게 영적 상속을 포기하고, 이기적 동기로 집으로 돌아오려 했는지를 설명하신 후에, 다시 우리의 주의를 이 비유의 중심적 위치인 아버지께로 돌립니다.

 예수님은 아직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음에도 이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즉시 아버지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들은 민망하여 자기를 죽은 자로, 자기 가족을 거부한 자로 여겨주기를 바랐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과 유산 중 삼분의 일을 가져다가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일반적인 반응은 분노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아버지는 불쌍히 여겨주었습니다. 아들이 어떤 변명도 하기 전에 손 쌀같이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영접하였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풍습과 달리 긴 옷을 입은 아버지가 달려가는 모습은 분명 이상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그 잠깐의 시간조차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이,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둘째 아들이 자신의 의도한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라고 명령함으로 울먹이는 아들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이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은 아버지가 이 아들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였음을 상징해 줍니다. 그리고는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이 잔치를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가족들뿐만 아니라 종들도 함께 먹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전체 공동체를 초청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여기에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비유에서와 동일한 사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되면, “그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것을 찾았노라.”라고 말합니다(6,9절).

 어쩌면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은 성급하지 않나 여겨집니다. 적어도 아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돌아왔는지, 정말로 회개하고 잘못을 후회하는지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라면 이 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것은 고사하고 같은 식탁에 앉지도 않으려 할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확실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두 부류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룹도 있었고, 저편에는 세리와 죄인들의 그룹도 있었습니다. 이 두 그룹은 서로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인간쓰레기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를 거룩한 자들로 여겼기에 저 죄인들과 같이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음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절대로 저들과 친구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연거푸 세 개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것과 잃은 동전을 찾는 것은 마치 쌍둥이 비유입니다. 둘 다 잃은 것을 찾았고, 벗들과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죄인 하나가 회개했을 때 하늘이 기뻐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기뻐하기 전에 그것을 증명할 만한 충분한 회개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세 번째 비유를 통해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들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본 아버지가 무엇을 했습니까? 아버지가 이 아들을 영접하기 전에 잘못한 일에 대한 변명을 들어야 했습니까? 진정한 회개의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고 교사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아버지의 특성이 ‘자비’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이 돌아왔고, 아버지는 이 아들을 용서하시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는 것이 주님이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죄인과 세리들 모두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1절, “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세리와 죄인들이 정말로 회개했는지, 그들이 영적 성숙에 도달했는지는 요점이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 앞에 나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때가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죄를 보고, 그 죄에 대해 회개하며 죄를 끊는 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대의 회중과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모든 자비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나를, 측은히 여기심을 맛보아”라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여 함께 먹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행동은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여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매혹적으로 여기실 만큼 성숙했습니까?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실 때에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를 기다렸다가 주셨습니까?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패역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사를 보내실 때에 이스라엘의 회개의 충만한 열매를 보신 후에 보내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 누구든지 비유에서의 이 둘째 아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아버지의 선물을 탕진하지도 않았고, 우리는 전적으로 회개했고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실만한 진실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주를 보내주셨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에게 정직합시다. 나는 죄인이고,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깨달음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나의 죄에 대한 슬픔이 불완전하고, 나의 회개는 이내 또 다른 죄로 말미암아 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03편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11절)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신다는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복음을 가르침으로 당신의 비유를 끝내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세리와 바리새인들에게 교훈하기를 원하셨는데 그것이 맏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은 아버지의 용서의 복음에 대해 또 다른 형태로 불신앙으로 행하는 맏아들을 보여주시면서 청중들에게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한 도전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요점입니다.

 둘째, 아버지의 불쌍히 여김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참 잔치의 즐거운 상황을 묘사하다가 이제 비유의 무대가 집 밖으로 옮겨집니다.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오다 잔치 소리를 들었습니다. 맏아들은 종을 불러 잔치의 이유를 묻고, 이에 종이 대답합니다. 27절입니다. “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종은 잔치의 정확한 이유를 전해줍니다.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잔치의 이유는 아들이 돌아온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이유를 들은 맏아들은 노하여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는 맏아들이 가족에서 자신을 잘라내고 있습니다. 절교합니다.

 여러분,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왔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들을 달래며 풀어주기 위해 아버지가 잠시 밖에 나오는 일에 대해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대의 유대공동체는 오늘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잔치를 배설하여 손님을 대접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관습입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아버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이 아버지는 그 시대의 행동 규범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공식적인 자리를 떠나 지금 가족 중에 잃어버린 바 된 큰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동생의 돌아온 이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도록 권합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아버지의 면 전에서 아버지를 모욕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여러분! 큰아들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자기 동생과 비교해서 자기가 동생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자랑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버렸다고 비난합니다. 감히 자신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신 반면에,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라도 내어주신 적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아버지의 처사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형이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배설하기 전에 동생의 잘못에 대해 책망하고 그가 참으로 회개하고 있는지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큰아들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이해되고 동의되지 않습니까?
 본성상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요구에 대해 계속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아들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큰아들이 비록 악의를 가지고 말할지라도 아버지는 부드러운 사랑으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31절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네 아우가 집에 왔다는 것이 네 상속권을 박탈당함을 말하지 않는다. 너의 분깃은 여전히 그대로 다 너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하길,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절).

 여러분! 왜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예수님은 여기에서 인간의 지성에 옳고 마땅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행위에 대해 묘사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동기에 상관없이 죄인들이 하나님께 올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에게 냉담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생활에서 좋은 열매의 증거들이 나타날 때까지 죄인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잃은 양은 그 목자가 그 양을 보았기 때문에 찾았습니다. 잃은 동전은 과부가 그 동전을 보았기 때문에 찾았습니다. 여러분! 목자나 과부는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이사야 55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세리와 죄인들을 포함한 잃어버린 자들이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자기가 이룬 것, 자기가 얻은 것에 손도 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잘못입니다. 큰아들도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마음, 즉 잃은 자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무가치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비유에서 맏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맏아들은 아버지의 호소를 듣고 탕자가 돌아온 잔치에 참여했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이 이야기의 나중 전개에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언반구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맏아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죄인과 세리들이 예수님께 나아 온 이 잔치 자리에 참여하라는 초청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이 초청에 귀를 기울였습니까? 그들이 함께 잔치에 참여하며 먹고 마시며 자기의 교만을 억누릅니까? 아니면 죄인과 세리들이 자신들의 식탁에 앉기 전에 먼저 삶의 방식을 바꾸고 율법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교만을 고집합니까? 그들은 자신들과 죄인들이 언약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고,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인정합니까?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을 주님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진리를 상속받은 하나됨의 교회가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하나됨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모든 도전에 우리는 오늘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부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노후에 대한 준비와 대처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정치지형에 대한 견해차도 특정 이슈에 대한 차이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됨을 용납하지 못하는 진영간의 분열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코로나 이후에도 우리의 일상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추후 또 어떤 일이 사회적 도전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이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는 주님의 이 요청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응답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다만 야웨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이 비유를 기록함으로 오늘 설교를 듣는 우리도 또한 이 요청에 생각하고 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도전이요 싸움입니다. 이 도전을 겸손히 받으시고 올바르게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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