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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sermon
주일오전예배
작성자 파루시아
작성일 2020-09-20 (일)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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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옥중에서 건져 내심
베드로를 옥중에서 건져 내심
2020년 9월  일 주일오전 설교
성경봉독 : 사도행전 11:19-30 12:1-25
설교본문 : 행12:




오늘 12장의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큰 시련(1-4절), 교회의 기도와 베드로의 극적인 구출(5-12절), 기도 응답을 믿지 못하는 교회(13-17절), 헤롯 왕의 계획 좌절과 하나님의 심판(13-23절),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바나바와 사울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옴(24-25절)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교회 지도자 핍박(12:1-4)

‘그때에’(1절)라는 바로 그때는 예루살렘이 기근으로 어려울 때 사울이 후원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올라간 시점을 말합니다. 유월절 절기 전후 무교절입니다. 그런데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헤롯왕은 바로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1세입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로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글라디우스가 황제에 오르자 그 친분을 이용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 헤롯 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을 때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까지 죽여서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교절인 관계로 죽이지 못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무교절이 끝난 후에 베드로를 반드시 죽이려는 의지를 가지고 철통같이 감시한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교회의 기도와 기도 응답으로 베드로가 구출됨(5-12)

그때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예루살렘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간절한 기도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와 같은 동사가 사용되므로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구출되어 그들의 장소에 올 때까지 기도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12절). 그 밤이 지나면 베드로는 죽을 수도 있었는데 감옥에서 평안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풍랑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눅8:23).  베드로는 양 손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두 군사는 베드로 좌우에서 감시했으며, 그가 있는 감방문 밖에서는 나머지 군사들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완벽한 감시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을 막는 데는 전적으로 무력했습니다. 감시는 철저했고 베드로는 자고 있었는데, 천사가 나타났고 어두운 감옥에 빛이 비쳤습니다(7절). 이 때 베드로를 감시하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말하지 않습니다. 18절에 이들이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 들었다가 날이 샜을 때에야 비로소 깨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급히 일어나라’하고 깨웠습니다(7절).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저절로 풀어졌습니다. 천사는 깨어난 베드로에게 ‘옷을 입고 신을 신으라’고 촉구했습니다(8절). 천사는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내가 지금 환상을 보는가’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날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을 알겠노라”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로데라는 계집 종이 영접하려고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듣고서 문을 미쳐 열지도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네가 미쳤다고 하고 그래도 힘써 말하여 참말이라 하니가 이제는 그의 천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서 문을 열고 베드로가 있는 것을 보고서 너무나 다 놀랐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자기가 어떻게 풀려난 것을 말하고 그 밤에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날이 새어 군인들이 어떻게 된 일인줄을 알지 못하고 헤롯은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기도한 사람들이 믿지 못했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반드시 돌아와야 할 어떤 절대적인 사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반드시 그가 돌아와야 할 필연성을 알 만한 아무런 것이 없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기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면 안 됨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를 건져 내신 그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과 기이하신 손은 하고자 하시면 언제든지 이런 일들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많은 믿는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특이한 이런 기적적인 일들에 대해 생각할 때에 하나의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건지셨습니다. 이런 것은 많은 신자들에게 주님의 크신 손이 직접 주장해서 아무리 큰 위험 속에서라도 자기를 보호한다는 용기를 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용기보다는 왜곡된 신앙을 추구하게 됩니다.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많은 환난이 있고 혹은 순교를 해야 했던 가혹한 탄압과 핍박이 있던 시대에는 옥중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손, 베드로도 건져내신 그 손을 생각하고, 뜨거운 풀무에서 세 사람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그 권능의 손과 사자 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의 손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광야 마라에서 목마른 이스라엘에게 단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당하는 어려운 현실에서 쓰러져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는 위대한 믿음의 용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를 그 몇 가지 성경에 나오는 특별한 기적적인 사실과 같은 양태로만 늘 대처해 주신다고 해석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끝까지 견디면서 영광을 욕되게 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그들에게서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항상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저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라는 이 시편 55:22에 있는 말씀과 같은 허락이 있습니다. 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여호와, 우리 구주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68: 19). 또 신약에 와서는 “네 짐을 주께 다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라”(벧전5:7) 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살라는 중요한 권고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또 그것만을 강조하면 때때로 오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즉 사람이 어떤 중대한 문제, 인생의 문제, 사회의 문제 앞에서 ‘내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립니다’하고서 주님께서 그런 문제를 우리 뜻대로 해결하시고 고통과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한 대로 모든 문제를 다 제거해 주시느냐 하면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문제와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때에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기대하는 양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 뜻을 다 알지 못하기에 그냥 주님의 처분까지도 겸손히 맡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결정하시고 어떻게 처리하시든지 다 주님의 처분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지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원하는 뜻대로 다 결론하고 해결하여 주시옵소서'하면 이것은 자기가 구상한 해결 방법이고 주님의 뜻은 아닌 것입니다.

언제나 기적으로만 우리를 악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님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주님은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복잡한 악과 병폐를 모두 다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해결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할 때에도 세상의 병폐나 개인의 여러 가지 악에 대해서 마음의 진통이 있고 고통이 있어서 그 고통 대해서 호소할 때 '예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은 거기에 다 해답 해 주십니다'고 하면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교통문제가 심각한 이 사회 환경에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교통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문제가 심각하든지 물가가 오르면 예수 믿는 사람도 같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악은 그것이 물질적인 어떤 것이었든지 혹은 사상적인 것이었든지 혹은 그것이 좀더 심오한 정신적인 것이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회 일반생활의 세태적인 것이었든지 그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누구나 함께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같은 정도로 고통을 준다거나 또는 믿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훨씬 안 준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깨닫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고통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사회의 현상으로 봐서 흉년이 들었다면 흉년든 지경에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깁니다. 그렇다고 흉년이 금방 풍년으로 바뀌거나 또 이 사회의 병폐와 악과 진통이 만연할지라도 금방 다 제거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만 어려움을 당하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에 따라 그것을 다 제거해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터위에서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릴 때 주님은 피할 길을 내사 가장 지혜롭고 가장 긴요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반드시 베드로와 같이 옥중에 갇혀 있는 사람을 다 옥에서 이런 식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감옥과 같이 용광로와 같이 고통스런 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제 시대나 군부독재 시대에 수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렇게 베드로 같이 다니엘 같이 건짐을 받는 일들이 있는데 왜 지금 죽고 옥에 갇히고 그런 자가 많이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성도들이 옥에서 죽어 가는가?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아야만 이런 베드로의 기적과 그 여타 아주 희망적인 격려를 할 만한 말들이 절망보다는 참되이 신앙의 광명을 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 해석하면 광명이 아니라 왜곡된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옥에서 건졌으니 이 경우에도 우리가 그 옥과 불에서 건져지리라고 하면 잘못된 이해와 환상이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건지셨으니 우리도 불 가운데 건지실 것이라고 왜곡된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뜻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나타나 보이신 것은 이 땅은 우리가 있는 까닭에 곧 천당과 같이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과 죄와 병폐와 악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있는 그 여러 가지 상태에서 너도 같이 당할지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려고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장은 자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그 일을 이루어 나가는 데 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점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약속을 믿는다 할 때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려면 생활의 확실한 생생한 경험들이 필요합니다. 이 경험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었더니 과연 홀연히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그런 식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맡겼으니 순하게 다 문이 열려서 가게 했다'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의 응함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특이한 예는 대단히 희소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에게 신앙의 표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낫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은 좌절과 절망에 빠집니다. 주님을 이용해서 사회의 병패든지 개인적인 고난이든지 어떤 결핍이든지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그 약속이라든지 주님의 그 능력을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경험한다 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본래의 의도를 나타내며 이 세상의 현실을 통제하시는 그 터 위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제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때를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인류 위에 임하게 하셔서 지진도 나고 고통과 어려움도 당하고 사회가 혼란을 겪기도 하고 경기는 갑자기 나빠지게 되고 전쟁도 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제하시는 방법입니다. 현재도 때를 따라서 인류 위에 가하고 개인에게도 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이 있는 까닭에 인류 전체 위에 하나님의 형벌이 임할 때에는 이러한 세상에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벌이 가령 경제에 큰 공황이라는 현실로 임하거나 전쟁이라는 형태로 임했다 할 때 그 속에 우리를 보냈으면 그러한 시대의 상황 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바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만 그것을 피하여서 아무 문제가 없겠고 나만 유토피아로 가장 안전하고 홀연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그런 식의 문제 해결을 바라고 나간다면 세상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온데 간데 없어지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는 세상에 우리를 두시는 이유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느냐?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을 이용해서 긴요하게 아주 잘 피하면서 살려고 있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려고 했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중생케 하신 그 시간에 어떤 사람들 생각대로 천당으로 데려가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땅에서 예수를 믿고 홀연히 평안한 세계를 얻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라는 그런 식의 생각들, 자기의 행복과 기쁨을 얻는 그 세계만을 생각하는 것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통제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엄위와 그 인자를 가지고 통치하고 계시는 그 땅입니다. 권능의 왕이 그 왕국을 통치하고 계시는 그 현실에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개인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와 인도가 반드시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다 꼭 같은 양상으로 환난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같은 전쟁 속에서도 사는 사람이 있고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도 좀 안정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냥 고통 속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흉년에 있었어도 좀 괜찮은 사람이 있고 더 고통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인차가 많이 생깁니다. 주를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가장 적절하게, 또한 개인적인 모든 은혜를 그의 크신 섭리로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섭리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런 환난 가운데에서 마음에 요동함이 없이 평안을 늘 얻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큰 사실 앞에서 나를 보내신 목적을 이루도록 항상 전진시켜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경험입니다. 이는 내가 생각한 대로 홀연히 문제가 해결돼서 평안하게 된다든지 우리들이 생각한대로 홀연히 사회적인 악과 병폐가 제거돼서 거기에 낙원이 건설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든지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상향을 땅 위에다가 건설하시는 게 아니라 선택한 사람을 뽑아서 마침내 영광의 완성으로 이끌고 나가시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옛 하늘과 땅이 다 없어져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땅 위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인류 역사의 진행에서 흑암과 고통이 병행돼 가지고 있는 이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도 같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그런 위에서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영하 30도 되는 북극 지대에서 사는 사람은 믿든지 안 믿든지 모두에게 영하 30도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영상 30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거기에 계시면 그를 얼어 죽지 않게 지키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는 데서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신자라면 그 보장을 경험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까지 계속 끝까지 다 보존해 주시기에 내가 달려갈 길을 반쯤 달리다 중도에 죽는 일이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 말과 같이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는 나를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딤후 4:7-8)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묘한 손으로 때를 따라서 기이한 섭리로 역사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때 어느 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항상 옥에서 건지신 것은 아닙니다. 이때 한 번 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나온 기록에 보면 베드로는 결국 자기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노라고 하여 순교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순종할 때 또 건져내시지 왜 안 건져내십니까? 문제는 그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맡겨 버리면 다 주의 뜻대로, 주의 계획대로 이룰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환난이 있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는 엄연히 존재하고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통치의 대권을 안 믿는 사람, 불의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에서 덮어놓고 이상세계를 세우지 않으십니다. 거기는 형벌이 있고 진노가 있고 저주가 있습니다. 그런 곳에 우리를 보내시면 그러한 사회의 불안과 병폐 속에서도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개선하려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엄위와 능력을 전달하되 거룩한 교회로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유일의 행복을 주십니다. 유일의 행복은 본질의 교회, 보편의 교회, 참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서 사람의 사회를 별다른 단위로 취해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때때로 내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가장 방불하게 드러내겠다면 그것은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럴듯하게 나타냅니까? 그럴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험상 염려를 주께 다 맡겨 버렸을 때 주의 살피심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식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 욕심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작정대로 또 하나님의 경영대로 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모든 것은 어떤 경영일는지 어떤 작정일는지 전연 모르게 주시는 게 아니라 어떤 목표를 향해서 나를 전진시키는 방향으로 늘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목표를 향해서 늘 전진하여 갑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전진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나의 지체로서의 위치를 내가 알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내 분깃으로 담당하고 나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어도 가장 명료한 목표를 향한 자기의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생활입니다. 전진하는 생활입니다. 나 혼자 예수 믿고, 나 혼자 기도 열심히 하고, 나 혼자 예배당 열심히 다니고. 나 혼자 헌금 열심히 하고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혼자서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와 나, 또한 그리스도와 형제, 이래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합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거룩한 신령한 지체로서 존재로서, 비로소 목표를 향한 전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요한 사명을 다른 것보다 부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한 지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려면 다른 말로 하면 ‘나’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매일 생활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부인되어서 없어지지 않고는 못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내가 그냥 살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향해서 전진하는 생활이 계속 된다면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는 때를 따라서 필요한 대로 무엇이든지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옥에서 쇠사슬이 스르르 풀려지고 쇠문이 저절로 열려서 바깥으로 나가게도 하십니다. 우리 생활가운데서 경험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이한 손으로 나를 잡아다가 여기다가 썩 갖다놓는 때도 있고 기이한 손으로 문을 탁 열면서 가거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다 하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를 옥문이 열리게 해서 내놓는 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기이한 일이 왜 발생합니까?

우리는 소위 기적이라 할 때 아주 신비하고 기이한 일만 생각합니다. 의사가 병을 낫게 해주면 대단치 않게 당연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기도해 가지고 흘연히 나아버리면 대단한 것으로 아는데 결과에 있어서는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병이 낫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면 의사의 적당한 치료와 약을 줘 가지고 그 병을 낫게 해줬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미리미리 준비해 가지고서 합리적으로 어떤 결과를 맺게 하신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꼭 큰 어려움 속에 있다가 똑 떨어져 죽게 생겼다가 안 죽고 살아나야만 기이해서 신기해서 하나님의 기적입니까? 내가 위험에 있다가 그 위험을 용케 모면하면 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위험을 당하지 않고 편안한 곳에 건강하게 늘 놔두면 별로 그 은혜를 생각지도 못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여러 위험한 상황에 두셔서 아슬아슬하게 면케 해주시는 것보다 항상 평안함을 주십니다. 그것이 더 기이하고 감사한 사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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